#간절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1. 내가 처음 Compass Group을 접한 2011년
Johnson & Wales 대학원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뒤쳐지기 싫어서 수업마다 발표할 프레젠테이션 분량들을 쉼표까지 달달 외우며 엄청나게 공부하던 시절. 졸업을 1년여 앞두고 동기들은 '인턴쉽'을 나가곤 하였다. 무식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미국으로 건너왔던 나는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그냥 남의 일이거니하고 인턴쉽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마 그 때 어느 곳에선가 인턴쉽을하고 그곳에서 잘 보였다면 나는 훨씬 편하면서 지금보다 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미국인 친구 1명이 자기는 여름에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샬럿에 가게 되었다고 나에게 엄청나게 자랑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거기는 환승공항 큰 것 말고는 별 것 없는 것 아니냐'고 너는 참 긍정적이라고 코멘트를 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게 '너 Hospitality를 공부하는 학생이면 꼭 Compass Group은 무조건 알아두는 것이 좋을거야. 나는 거기에 인턴쉽 가게 되어서 너무 행복해' 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결코 외국인이라 그것도 모르냐는 무시가 아니라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 친구와는 가끔 그 시절 패기 넘치던 나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하기도 한다.
그 때 나는 처음 Compass Group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내 미국에서만 큰 회사가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이 분야 1위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출이 30조원에 육박하는 기업인데,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신세계, 삼성 웰스토리 등의 기업이 롤모델로 삼고 자문 및 경영 노하우 전수 계약 등의 정도로만 진출했으며 현재 삼성 웰스토리가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Compass Group은 내가 다니는 Johnson & Wales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출신 학생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아주 다양한 경로로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4개 캠퍼스 중 1개는 샬럿이라는 같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학협력 관계가 매우 두터운 관계이다. 입사 후 알게 되었지만 현재 경영진 및 임원진에는 우리 학교 출신이 매우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의 소개편에서도 소개를 했지만 (하단에 내용을 다시 첨부) 하고 있는 사업 분야가 정말 상상 이상의 회사였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너무나도 가고 싶은 회사였다.
주 된 고객과 사업영역은
- 아마존, 구글, JP모건,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시티그룹, 소니, 미 주정부, 대학교 등등 대기업, 공공기관 등의 Corporate 및 단체 Dining 운영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링컨 아트센터, 워싱턴 소재의 스미소니언 산하 박물관들 등 여러 유명 문화센터 카페, 바, 레스토랑 등 운영
- 각 종 유명 경기장 식음료 판매 사업 및 올림픽, Superbowl, NBA 결승, US Open, 켄터키 더비 등 스포츠 이벤트 케이터링 및 급식사업
- 아카데미 (오스카) 시상식, 그레미어워드 등 문화행사 케이터링
- 교육기관, 병원 및 노인복지시설 (미국의 시니어케어는 훌륭하다) 기관의 식음료 서비스
2. Compass Group에서 경력을 쌓을 것을 조언받다
2012년도 초반에 삼성 에버랜드에서 보스턴, 그리고 뉴욕 & 뉴저지 채용설명회를 온적이 있다. 나는 보스턴에 1회, 그리고 3시간 30분을 운전하여 뉴욕 & 뉴저지 채용설명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에버랜드는 내가 대학교 때 인턴쉽의 개념으로 3번의 방학 때마다 일을 해본적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사실 그 때까지만해도 미국 취업보다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훨씬 큰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달려갔었다. 당시 인사과장님과 기회가 되어 1:1 커리어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었고, 채용설명회시 채용할 포지션이 대부분 신입사원 부문이라서 MBA를 졸업한 이후에 바로 한국에 들어오는 것보다 미국에서 5년 정도 경력을 쌓고 들어오면 한국에서 매우 좋은 위치로 이직이 가능할 것 같다며 현지 취업을 우선 추천해주셨다. 그 때 유일하게 실제 회사 이름을 거론해주시며 추천해주신 기업이 Compass Group 이었고, 졸업시 지원할 1순위 회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삼성 에버랜드는 리조트 사업부문 외에도 사업 확장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Compass Group을 롤모델로 삼고 성장시킨 자회사가 삼성 웰스토리였다. 당시 그 분은 그러한 부분을 알려주시며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Compass Group에 입사 도전해보기를 권하셨다. 어떠한 근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께서는 내게 Compass Group에 입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주셨다. 비록 그 이후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그 예상은 적중했다.
3. Career Fair, 그리고 준비 노하우
졸업을 1년이나 앞둔 2011년. 나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Career Fair에 참석해볼 용기를 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준비하던 시절에 참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수많은 리서치를 통해서 자기소개 연습 및 비즈니스 에티켓에 대하여 공부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계산기를 내재하고 있는 프로페셔널한 메모수첩, 명함지갑, 특수용지에 인쇄한 이력서와 커버레터 그리고 폴더 등 많은 준비를 했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보스턴의 한인 미용실을 찾아서 머리도 가꾸었다. 당시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라 머리를 자주 자르지 않아서 단발머리 수준까지 머리를 기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창피한 나의 모습이었다. 학교 커리어센터와 인터네셔널센터에 방문하여 이력서 및 커버레터 교정을 받기도 했고, 자기소개 연습도 수없이 하였다.
나만의 노하우를 공개하자면
내가 모든 수업 때마다 창피하기 싫어서 썼던 방법들이었는데, 좀 더 자신감있고 자연스러운 발음을 위해 1차로 대본을 만들고 (왜냐하면 보통 내가 먼저 리쿠르터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어느 회사 부스를 가건 똑같은 상황이었을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달달 외웠다. 완벽히 외울때까지 20번 정도 거울을 보며 반복했다. 이 정도만해도 만족스러울법 했겠지만 나는 더욱 완벽하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녹음기능을 켜서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다시 듣기를 반복했다. 발음과 엑센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엄청난 반복을 하였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녹화하곤 하였다. 흔한 방법일 수 있고 이상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준비에 효과적인 것은 없었다.
내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한 것도 녹화된 모습을 보면 너무 형편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한 제스쳐와 어쩔 줄 모르는 손동작과 시선 등 교정해야할 것들이 매우 많았다. 나는 이토록 나에게 철저하고 완벽하고 싶었다. 아무리 미국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나라를 표방한다지만, 실제로 여기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마이너로서의 삶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외국인이라는 패널티를 갖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에 더욱 처절하게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미국 대학원의 흔한 수업방식인 Debate이나 Presentation을 할 때에도 지지 않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오곤 했었다.
내 준비의 끝은 항상 '그' 장소를 사전에 방문하는 것이다. 실제 발표나 면접에 가게되면 익숙치 않은 주변환경과 변화 등에 의해서 철저히 준비한 것들도 잊어버리거나 놓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당황하는 내 모습만큼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도 없었기에 나는 커리어페어가 열릴 학교 강당에 사전 방문을 자주 했다. 또한 학교 측에서 사전 공개한 부스의 배치도, 그리고 이전 연도마다 벌어진 커리어페어 사진들을 참고하며 미리 현장 분위기를 많이 익혔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많은 네트워킹과 리쿠르터들에게 긍정적인 어필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나는 졸업 때까지 총 4번의 커리어페어에 참석했고 나를 먼저 기억해주는 리쿠르터들까지 생길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많은 인터뷰를 제안 받았었다. Compass Group을 포함해서!
4. 얘기치 못한 재앙
외국인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취업하는 것은 늘 큰 제약이 수반된다. 자국민의 취업시장 보호를 위하여 신분과 조건에 매우 까다로운 것이 미국 이민국이다. 그래도 유학생들을 위해서는 OPT라는 졸업 후 임시 취업 비자가 제공이 된다. 그 기간동안 회사에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고 시기나 조건이 맞을시 정식 비자 스폰서 및 영주권 스폰의 행운을 얻게 된다. 나는 11월 졸업이었고, OPT를 문제없이 받는다면 12월에 취업하여 내 능력을 보인 후 4월1일부터 오픈되는 H1B 비자 스폰서를 받아서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해보고자 하는 목표가 생겼다.
여기서 간략히 H1B 비자에 설명을 하자면, H1B 비자는 외국인들이 가장 흔한 방법으로 스폰서를 받게되는 경로이다. 기본 3년이 주어지며, 3년 추가 연장이 가능한 비자이고 보통 추가 연장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영주권 진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1년에 단 1회 접수가 오픈이 되며 보통 4월1일 시작하여 모든 쿼터가 차면 접수가 마감되는데 911 테러 이후 다른 이민 경로가 많이 막히면서 H1B 경쟁이 매우 치열해져서 4~5일 정도면 접수가 마감되곤 한다. 그리고는 석박사 추첨, 학사+석박사 추첨의 순서를 거쳐서 최종 대상자 심사가 진행이 된다. 추첨에 당첨이 되고 범죄이력이나 신분에 불법적인 부분이 없고 스폰서를 해주는 회사가 자격이 충분하다면 9~10월 정도면 정식 비자가 발급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서 중국과 인도 등 H1B를 악용하는 기업 (허위 스폰서 등) 등을 강력히 규제하기 위하여 H1B의 심사가 매우 까다로워졌으며, 기준 또한 상향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고, OPT 문제만 없다면 '내가 인터뷰를 진행할 여러 회사들 중 골라서 갈 수 있는 확률도 있겠다' 라는 희망도 있었다. 당시 내가 인터뷰 제안받은 곳은 Compass Group, Hyatt 호텔, 메리어트 MIT (Manager In Training) 프로그램, Foxwood Casino & Hotel, Doherty Hospitality Gorup, Noho Hospitality Group 등 여러 곳이었다. 내 OPT는 정식으로 승인이 되었고, 나는 손꼽아 OPT 실물 카드가 배송되기만을 기다렸다. 이 때가 2012년 연말이었다.
재앙은 그 때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및 연말이라 우편물이 많아서일까? 배송은 한없이 늦어져갔다. 어느날 마침내 USPS (미국 우체국)의 트랙킹 시스템에 Out for delivery로 상태가 업데이트 되었다. 우편물이 우편집중국에서 내 주소로 배송을 나갔다는 뜻이었다. 각 회사 리쿠르터들에게 상황을 알렸고 인터뷰 스케쥴링 등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1~2일이면 도착해야할 OPT가 1주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USPS 여기저기에 전화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 우체국의 슈퍼바이저와도 통화를 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내 우편물이 아무래도 사라진 것 같다' 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노발대발하며 프로비던스의 우편 집중국을 찾아가 현장 항의를 하였다. 결과는 불보듯 뻔하였고 찾지 못하였다. 우편을 발송한 이민국에서 분실 보험 같은 것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도 못해준다고 하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나는 추가로 $300 (약 33만원)을 내고 다시 OPT를 신청하고 3개월반을 추가로 기다렸다. 물론 덕분에 내 모든 인터뷰 일정은 OPT 없이 일을 할 수 없음과 더불어 시기적으로 H1B 진행도 불가능했기에 모두 취소가 되었다. 참 많이 좌절하고 슬펐던 시기였다.
5. 마음을 가다듬고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한국에 돌아가느냐 아니면 미국에 남을 방법을 찾느냐. 내 선택은 후자였고, 열심히 비자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본 결과 내가 E2 Employee 비자를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E2 Employee 비자는 투자자, 즉 스폰서를 해줄 회사의 국적과 비자를 받게 될 직원의 국적이 일치할 경우 받을 수 있는 비자이며, 해당 회사의 미국 내 투자가 일정 부분 있어야 한다. 여기서 '투자'의 범주는 사업을 위한 자금 투입 뿐 아니라 미국내의 고용 창출 효과도 포함하기 때문에 조금 까다로운 비자이다. 또한 지원을 받을 직원의 경우 Managerial 포지션 이상의 직급에만 부여가 가능하다 (미국 기준으로는 높은 직급이나 한국 회사 직급 체계에서는 포지션에 manager를 붙이고 변호사가 포장을 잘 한다면 받을 수 있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한국 회사들을 알아보게 되었고, 한국계 대형마트나 자동차 회사와 협력사 등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다만, 좋지 않은 평가들이 많은 기업들이 있어서 고민하던 차에 SPC가 파리바게뜨 브랜드로 뉴욕 시장에 진출하여 사세를 확장하고 있음을 기사로 보고 미주사업부의 Assistant Manager 포지션에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한인 축구대회에 나갔다가 발목이 꺾여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에 인터뷰 제의를 받게 되었다. 화상 인터뷰도 가능하다고 연락을 받았으나 꼭 가야할 회사였고 간절했기에 나는 그 상태로 3시간반은 운전하여 뉴욕에 인터뷰를 오게 되었고, 좋은 면접관 분들을 만난 덕분에 SPC 미주 사업부에 입사하게 되었다.
열정적으로 일하였고 힘들기도 하였지만, 내게 SPC와 함께한 5년반의 세월과 경험은 지금의 회사에서 근무를 하게 된 밑거름이었다. SPC 입사시에도 내 포부는 한국에서는 대기업이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신생기업과 같기 때문에 회사가 성장함에 있어서 나도 기여를 하고 함께 성장하고 싶은 것이었다. 많은 상사분들께서 열심히 성실하게 근무했던 부분을 좋게 봐주신 덕에 승진도 빨랐고 좋은 기회도 많이 얻게 되었다. 특히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타임스퀘어 지점장과 고객서비스 강의는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지고 했던 일이었다. 또한, 나는 인재 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생각했기에 학교 커리어페어에 우리 회사가 참석하기를 희망하였고, 나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5년동안 우리학교 및 뉴욕의 커리어페어에 리쿠르터로서 부스를 차리고 지원자를 모집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나는 내 몸 사리지 않고 내 청춘을 투자했고, 힘들었지만 소중한 경험들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했던 것은 나는 내 인생의 평생 동반자인 아내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고, 주변의 많은 좋은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 일하는 방식과 성향이 맞지 않는 다른 동료들의 경우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나와 어울리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저 나는 내 방식과 내 커리어에만 중점을 두고 어찌보면 참 이기적인 회사 생활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회사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별도의 연재를 해도 될 정도로 에피소드가 많아 이 정도로 줄이면,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의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Compass Group에 재도전할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주권을 먼저 지원 받게된 아내와 그 배우자 혜택 덕분에 신분적인 제약이 전혀 없었고, 그 이후 약 반년을 고민한 끝에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2018년 10월에 퇴사를 하겠다는 통보를 하게 되었고, 새로 바뀌게 된 미국인 매니지먼트로부터 훨씬 좋은 조건과 함께 남기를 제안받았으나 거절을 하고 퇴사하게 되었다. 지금도 내 밑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지점장, 부지점장이나 직원들은 만나면 내가 파리바게뜨를 퇴사한 것이 너무나도 큰 충격이라고 한다. 그만큼 나는 회사에 뼈를 묻을 사람처럼, 그 회사에 충성심 가득한 직원인 것처럼 일을 해왔었다.
6. 도전의 시작
2018년 여름, 그 때 SPC 미주사업부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 새로운 보직으로의 이동을 앞두고 있었으나 여러가지 사유와 상황으로 딜레이가 되었고 근무 의욕이 크게 저하가 됐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가다듬기 시작하였고, Linkedin 이라는 커리어 소셜미디어를 전문적으로 가꾸었다. Premium 계정 등록도 하여 (매월 약 3만 5천원 정도 투자), 내 소개가 hiring manager들이나 recruiter들에게 강조 노출이 되도록 꾸미기도 하였다. 전략적으로 Compass Group의 채용관련 부서 담당자들과 Senior management들과 커넥션을 시도하였다. 이 때 무시당한 초대나 메세지는 상당히 많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 꿈은 이곳에 입사하는 것이라며 나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을쯤 졸업한지 한참 되었지만 나는 졸업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모교의 커리어페어에 가서 Compass Group 부스에 방문하여 나를 알렸다 (물론 Compass Group에만 간 것은 아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다른 회사에도 나를 알렸다. 몰래!). 뉴욕에 돌아와서 Online을 통해서 Flik라는 Compass Group의 한 섹터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5년간 뉴욕 시티로 출퇴근 하던 것이 지겨워 뉴저지의 한적한 동네에 오픈된 포지션에 지원하였고, 너무 행복하게도 Digital Interview 제안이 바로 오게 되었다.
Compass Group의 디지털 면접 시스템은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다. 질문이 공개가 되면 1분 이내로 답을 준비하고 5분 이내로 내 답변을 녹화하여 제출하는 시스템이었다. 또한, 미리 연습을 해볼 수 있는 옵션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아내를 면접관 삼아서 많은 준비를 하였고, 디지털 인터뷰도 후회없이 잘 마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섣부르고 오만했던 것 같다. 나와 아내는 합격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충만해있었고, 뉴욕 윗 동네에 있는 본사도 방문해보고 벌써부터 합격한 사람 마냥 해당 포지션의 근무지에 미리 가보는 등 섣부른 기쁨에 취해있다가 나는 보기 좋게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더욱 철저하게 나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면접관이라면 어떠한 것이 커리어적인 나의 매력일지를 분석하였다. 뉴욕 시내로 출퇴근하는 것이 싫었지만 사실 내 가장 큰 강점은 뉴욕에서 식음료 부분에서 경험을 쌓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에 대해서 다시 조사를 하게 되었고, 나는 Restaurant Associates 라는 섹터가 뉴욕에 본사를 둔 섹터이고 많은 프리미어 어카운트를 관리하는 회사임을 알게 되었다. 다만, 지원 당시에 많은 오프닝 포지션이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오픈 된 1개 포지션에 대해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기분 좋게 디지털 인터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전보다 훨씬 더 면접을 잘 치뤘던 것 같았다. 다만,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Restaurant Associates라는 회사의 본사가 뉴욕에 있는데 나 어필해보러 한 번 찾아가볼까?'라는 질문을 했다. 아내는 너무 내가 처절해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반대를 했다. 그녀의 관점은 지극히도 일리가 있었고, 회사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력서는 오직 온라인으로만 접수' 였기 때문에 나는 1차 면접을 치룬 상태에서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리스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내 꿈의 회사 입사에 대한 열정을 피력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나도 간절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대학원 시절 참석했던 커리어페어 때처럼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건물에 들어가기 5분전까지도 나는 고민을 하였고, 아내는 권하고 싶진 않지만 당신이 후회를 남길 것 같으면 그냥 들어가보라고 하였다. 어차피 떨어지면 안 볼 사람들인데 두려워할 것이 없지 않냐는 그녀 다운 호쾌함이었고 그것이 큰 용기가 되었다.
어지간하면 잘 긴장하지 않는 나도 그 회사 문앞에서는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6층에 있는 사무실 문을 향해 다가가던중 한 백인 여성분과 코너에서 갑작스레 만나게 되었고,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랐을 그 분을 위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그분께서는 너무 환하게 웃어주시며 괜찮고, Compass Group이나 RA를 찾아왔냐고 물으시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중인지 물어봐주셨다. 역시 Hospitality 회사는 다름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나는 아주 당당하게 Compass Group은 2012년부터 나의 꿈의 회사였으며, 그 도전을 하기 위해서 오늘 찾아왔다고 하였고, 나는 1차로 디지털 면접을 마쳤으며 당신이 괜찮다면 내 이력서를 HR 누군가에게 꼭 전달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무나도 스윗하다고 하시며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처음본다면서 본인 소개를 해주셨다.
그분께서는 RA의 인사담당 부사장이셨다 (Vice President of HR)
소름끼치도록 좋았던 내 '행운' 덕분에 정말이지 울 뻔 했었다. 그동안의 미국생활동안 힘들고 지치고 힘들어서 서러웠던 모든 순간들이 한방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즉석에서 그분은 내 전공이 Hospitality쪽이고 지원도 그 분야로 하였기 때문에 VP of Hospitality께 나를 소개해준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분과 즉석 면접을 갖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나의 멘토로 내 회사생활에 좋은 동기부여를 해주고 계신다. 나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와 경력에 대하여 들으셨고 내 태도와 비전에 대해서 큰 만족을 하시며, 나를 회사의 중요한 어카운트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책임자에게 연결해준다고 하셨다. 나는 여러가지 스크리닝과 지금 내 상사로 있는 지역 총 책임자와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입사를 하게 되었으며 (물론 면접을 갈 때도 철저하게 많은 준비와 자료를 수반하여 찾아갔었다), 그렇게 내 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면접 이후에 받은 합격 전화에 아내와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7. 나의 원동력과 동기부여 - My Family
내가 꿈의 회사에 들어올 수 있게된 계기와 동기가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가족'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가족의 범주는 내게 있어서 다양하다. 당연히 나를 성장하게 해주신 내 부모님과 가족, 내가 도전할 수 있도록 나를 다독여주고 믿어준 내 아내뿐만 아니라 내가 소중한 경험을 얻고 커리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나와 함께 일해왔던 동료와 직원들 또한 내게는 '가족'이다.
힘든 환경에서도 나를 적극적으로 서포트 해주시고 유학을 보내주셨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는 이 꿈을 반드시 이뤄냈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와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겁고 어려웠지만 이 큰 한걸음을 반드시 딛어냈어야 했다.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일해주고 나를 지지해줬던 내 직원들에게 나는 좋은 롤모델이고 싶었고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나는 Motivator가 되기 위한 도전을 했어야했다.
좋은 마음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큰 행운이 어우러져 나는 비로소 이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음 스텝을 위해서 이곳에서도 직원들과 화합하며 또다른 '가족'을 만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또다른 발전이 있다면 나는 이 '가족'들을 생각하며, 당신들이 내 큰 동기부여가 되었노라고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Compass Group과 함께하는 나의 성장은 계속될 것이고, 이러한 나의 도전과 움직임이 누군가에게 큰 용기와 도전의식을 자극하기를 바라며 이번 글을 마친다.
* 슈퍼루키에 정식으로 코칭을 진행하는 멘토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떠나 최대한 좋은 결과를 이루실 수 있도록, 그리고 좋은 네트워킹을 할 수 있도록 후회하시지 않을 만족스러운 내용으로 준비 했으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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