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맞이 왕보스 연설이 있었다.
다들 금토일월 총 4일의 연휴로 인해 들떠있는 상태였고 나 역시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장기연휴라 기분좋게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5시반이 퇴근 시간인데, 3시반이 되자 보스가 우리에게 청소를 하라고 지시했다. 신년맞이 기념. (이 곳은 우리가 직접 청소를 진행한다) 물 대걸레로 바닥을 닦으라곤 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책상도 닦고 컴퓨터도 닦고 바닥도 닦고 휴가간 동료 책상도 닦아주고
여차저차 하다가 4시좀 넘어서 프로덕션 라인의 사람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였다. 자리에 다 모이자 왕보스의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왕보스는 영어로 연설을 진행했고 왕보스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다른 보스가 중국어로 통역을 진행했다.
사실 왕보스는 말레이시안이지만 중국어와 영어를 둘다 유창하게 잘 하는데 통역을 굳이 왜 내세우는지 싶었다. 영어 중국어 둘다 멋지게 하면 간지날 것 같은데 그냥 영어만 쓰면서 '난 너희와 달라'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이건 내가 요즘 너무 삐뚤어져서 이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근데 왕보스의 동생이 중국어 통역을 너무 못해서… 옆에 있던 말레이시안 동료가 차라리 내가 하라고 그럼 더 웃길 것 같다고(…)
미리 말 해두지만, 난 절대 중국어를 그만큼 하지 못한다. (지금은 공부 안해서 더 퇴보했다)근데 진짜 순간 속으로 ‘내가 해도 저것 보단 잘하겠다’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삐뚤어진 마음이 들었는고 하니, 그 내용인 즉슨 이랬다.
“
2017년 신년 맞이 왕보스 연설문
번역 : 외노자
회사가 너희를 위해 일자리를 제공해주니 너희는 나의 회사라는 생각으로 일을 해라!
요즘 고객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이유는 너희가 일을 너무 천천히 해서 3,4개월치의 주문이 밀려있다. 그래서 야근을 좀 해라. 원래는 보통 7시까지 야근이었지만 최소 8시까지 아니 적어도 9시까지 야근을 하면 좋겠다.
요즘 고객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다. 이유는 너희가 일을 너무 천천히 해서 3,4개월치의 주문이 밀려있다. 그래서 야근을 좀 해라. 원래는 보통 7시까지 야근이었지만 최소 8시까지 아니 적어도 9시까지 야근을 하면 좋겠다.
여기로 온 중국인들, 말레이인들, 인도인들 가족들이 없어서 힘든 타지생활을 하는 것을 안다. 그래도 여기 이 회사 동료들이 다 가족이지 않니? 가족과 같이 친하게 지내라.
(여기서 말레이시안 동료와 실소를 멈출 수 없었다)
또 여기는 너희의 회사이자 집이다. 집이란 말인 즉 너희 중에 집안에 쓰레기 버리는 사람 없지 않니? 의자로 바닥을 긁는 사람 없지 않니?
근데 이런 기본적인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습관을 갖자. 일 끝나고 의자도 좀 집어 넣고 가고 책상도 좀 치우고 가고. 우리 중국지사는 벌써 이 습관이 잘 되었다.
이건 인종이 달라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또 생산라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피스도 포함. 한국, 말레이, 중국, 싱가폴 모든 인종에게 적용되는 문제다. 모두 다 같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이런 문화를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자.
음.
이걸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1. 일이 3,4개월치 밀린 것은 잦은 직원들의 교체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싱가포르 오피스들이 대게 그렇다고 하는데 직원의 잦은 교체로 제대로 된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책임감이 결여된채 일하고 있기에 제대로 된 생산성이 보장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 직원들이 왜 자꾸 들어오고 나가는지는 당연히 기업문화와 연봉 때문인데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없이 단순히 고정지출만 줄이려고 하는 결과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는건지.
2. 회사가 노동자들을 가족같이 대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가족같이 여기라고 하는건지, 누군들 회사 즐겁게 다니고 싶지 않겠는가. 허나 이런 노동환경에서 고성이 오가고 매일 쪼고 보채는 분위기 가운데서 일 하는데 이 물가 비싼 싱가포르에서 월급은 600불 (대략 50만원)을 주며 일하니. 참 가 족같이 대해준다.
3. 최악의 훈계중 가장 탑이라고 생각하는 '비교' 여기 노동자 중 어느 누구도 중국지사가 어떤지 궁금한 사람도 알고싶은 사람도 없는데 왜 이런 비교를 하는지. 그렇게 중국 지사가 좋으면 여기 문 닫고 중국으로 가면 되는건데 (근데 진짜 여기 문 닫고 중국으로 간다 ㄷㄷ)
물론.
왕보스의 말이 틀린 말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나.
허나,
노동자들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마음이 전혀 느끼지 않았기에 이렇게 내가 분노로 점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장연설이 끝나고 나서 우리에게 오렌지와 빨간봉투(홍빠오)를 나눠줬다. 나는 보스옆에 서있다가 오렌지를 나눠주면서 신년축하(신 니엔 콰일 르어)를 외치며 모두 나눠주고, 나 역시 오렌지와 홍빠오를 받았다.
홍빠오에는 빳빳한 10불이...
사진 찍어놨었는데 없어서 구글 펌. 홍빠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이럴거면 주질 말던가 라는 생각.
다른 '평범한' 회사들처럼 13개월 보너스를 주는것도 (보통 1달치 보너스를 받곤 한다) 설날 기념 보너스(13개월 보너스가 없으면 설날 보너스를 받거나 둘 다 주는 회사들도 있다)를 주는것도 아니고
고작 10불 주고 오렌자 하나 주면서 이런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난 후
인자한 미소를 띄고 직원들에게 홍빠오를 나눠주는데
그 표정을 보니 마치 자신이 엄청 좋은 보스인양, 직원들을 아껴주는 보스인양 흡족해하는 모습처럼 여겨져 괜스레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주어진 것에서 만족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이미 마음이 떠버렸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자꾸만 생각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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