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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에서 내일 당장 일을 시작하는 사람으로써. 사실 3주 전의 해프닝인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최악의 면접 후기를 써야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 기업과는 연을 끊었고, 다시 만날 일도 없으며,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역겨운 기억이기에. 굳이?라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혹시나 나 같은 구직자(라고 쓰고 피해자라고 읽고 싶다.)가 싱가포르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심지어 그 회사에서 일을 할 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몇 자 글을 적는다. 


 싱가포르에서 유명한 구직 웹사이트가 몇 있다. 한국으로 치면 사람인, 잡코리아 같은 웹사이트. JobsDB, Indeed, Jobstreet, Monster 정도가 있고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LinkedIn, neuvoo(이 사이트는 그냥 모든 웹사이트를 크롤링해서 보여주는 사이트다. 예를 들어 가장 저렴한 호텔을 검색할 수 있도록, 싸그리 최저가 이름을 단 호텔 가격 관련 정보를 모아서 보여주는 트리바고의 느낌.) 이 있는데, 우선 구직자가 많이 찾는 웹사이트는 저 네 곳이다. 여느 때처럼 백수이자 구직자의 하루를 시작하던 어느날, 모르는 전화가 왔다. 인디드에서 내 이력서를 열람했는데, (인디드와 몬스터는 내 이력서를 올려놓으면 키워드 기반으로 헤드헌터나 기업에서 내게 컨택을 할 수 있다. 물론 터무니 없이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연락 온 경우가 다수였다. 즉, 구직 과정에서 도움은 안 되었다는 얘기다.) 디지털 마케터를 찾고 있으니 면접을 볼 의향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디지털 마케팅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나로써는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회사의 웹사이트까지 찾아보고, 링크드인에서도 검색해보았는데 작지만 나름대로 괜찮아보였다. 로컬 기업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하고, 배울 것이 많은 사내 문화를 갖추고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컸다. 링크드인에 검색해보자 미국인 한 명도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소기업이라도 어느 정도 좋은 포지션과 베네핏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콧대높은 미국 사람도 근무하는 것이라는 판단까지 내렸다.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 왔으니 내가 가진 경험과 경력, 소프트 스킬 등이 마음에 드는 것이리라. 이 회사가 이상한 곳이 아니라면 월급은 얼마든지 적게 받아도 괜찮으니 커리어를 쌓고 싶다는 희망이 다시 뭉게뭉게 피어났........었다. 젠장.


 회사는 창이공항 근처, 어마어마하게 먼 동쪽에 위치해있었다. 대부분의 큰 회사, 다국적 기업 들은 남쪽 CBD에 몰려있다. 탄종파가, 래플스, 시티 홀 등. 그 밖의 여러 크고 작은 회사는 중부나 북부 우드랜드 같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이 회사만, 정말 세상의 끝 땅끝마을마냥 싱가포르 국제 공항- 창이공항보다 더 동쪽에 따로 있었다. 얼마나 머냐하면......... 심지어 지하철도 근처에 없었다! 오직 버스로만 통근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회사라면 뭐, 왕복 3시간이어도 괜찮겠지. 그 생각에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옷과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이력서를 뽑아서 회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또 1km를 걸어가야했다. 정말이지 그 땐 내가 잘 못 내린 줄 알았다. 회사 근처에 온통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는 인부들과 물류창고, 까마귀들과 달팽이들이 돌아다니는 공터 뿐이었다. 구글맵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겨우겨우 그 회사에 도착했다. 주변 환경은 그 때도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는데, 겨우 회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했다. 

 '뭐 이딴 회사가 다 있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오라는 직원들의 말에 억지 미소로 화답하며 나는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회사는 양말 혹은 맨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몇몇 직원들과 빨갛고 거대한 가스통, 곳곳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상과 조각상들로 말도 안되게 어수선하고 수상쩍은 인상을 줬다. 사이비 종교의 작은 예배당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정상적인 회사 사무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부터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한 시간 반이나 걸렸으니 최대한 면접은 잘 봐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면접에 임했다.

 

'자기 소개', ' 마케팅 경력 ' , '싱가포르로 온 계기', ' 지금 살고 있는 곳', '포트폴리오 기반 질문' 등등 평이한 질문을 마쳤다. 그때 다른 사람 한명이 내 앞 테이블로 와서 면접관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면접관 소개도 안하고 이렇게 제 멋대로 면접을 진행해도 되는 건가? 황당한 기색을 감추고 그가 묻는 질문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질문들은 한국 기업의 면접만큼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할 사람을 원한다. 마케팅 직무를 뽑는다고는 했지만 영업 쪽도 맡아야 한다. 괜찮은가?'

'디지털 마케팅 직무를 담당하는 것은 맞지만 콜드콜과 인바운드 영업도 확실히 책임져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말에도 나와서 일해야 하며, 자주 일요일에도 나와야 할 지 모르고 야근은 필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일할 수 있는지?'

'우리는 유럽 사람이나 북미권 사람들을 채용하진 않는 편이고 아시아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과 로컬 사람들 등등. 왜냐하면 아시아인은 일을 정말 열심히, 또 오래 하기 때문이다.(탐욕스러운 미소와 표정이 포인트)'

'만약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본인의 친구나 지인 중에 영업을 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어떻게 우리의 마케팅 솔루션을 구매하라고 설득할 것인지?'

 

이게 압박 질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직시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마케터를 뽑는다고 했으면서 영업사원을 뽑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에 경악했고 동시에 야근에 주말근무 필수라는 쌍팔년도식 헬조선의 그림자를 느끼자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팀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동양인'은 일을 미친듯이 하니 회사에는 참 좋은 일벌레이다라는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면접을 저 따위 수준 이하의 회사와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욕적이어서 나는 대답을 능구렁이처럼 잘 마치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말 그대로 '눈물 젖은 빵'을 억지로 삼켰다. 아침도, 점심도 못 먹은 채 내 상황이 서글퍼서 울며불며 베어 먹는 빵은 그냥 서러움 그 자체였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홀로 누워 책을 읽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진이 빠졌다. 앞으로도 이런 수준의 회사밖에 택할 수 없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암담하고 답 없는 질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아니면 영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저런 노동 착취급의 회사라도 군말없이 다녀야 하는 건지, 정말 내게는 이제 기회가 없는 것인지 한없이 불안해서 눈물만 조용히 흘렸다. 극도로 우울한 상황에 놓이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탈출구인, 낮잠을 선택했다. 잠을 한 숨 자고 나면 지금 느끼는, 벼랑 끝에 놓인 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아까 면접본 E회사입니다. 00씨 맞으시죠?'

'아, 네. 맞는데요.'

'우선 1차 면접 합격하셨어요. 그래서 그러는데, 오늘 다시 회사로 돌아오셔서 면접을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

'저희 회장님께서 내일 아침에 싱가포르를 떠나 출장을 가십니다. 회장님께서 00씨를 한번 보고 싶어하시는데요, 출장가시기 전에. 2시간 안에 다시 사무실로 오실 수 있나요?'

'(이 무슨....)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늘은 다른 중요한 할 일이 있는데요. 2시간이고 뭐고 오늘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몇시에 끝나시는데요?'

'저녁 쯤에 끝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녁에라도 오세요. 7시나, 8시 쯤 가능하신가요?'

나는 이 부분에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기요, 죄송한데 오늘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렇게 면접이 다시 잡힐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녁도 안 될 것 같은데요. 회장님이 출장 가셔서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셔서 전화드린 겁니다. 그 분이 뵙고, 그 다음에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거니까요. 그래서, 오늘 못 오시겠다는 건가요?'

'말씀드렸잖아요. 죄송합니다.'

'저희와 오늘 이야기 나눈 포지션에 대해 정말 관심 있으시다면, 진짜로 오늘 오시는 게 좋으실 텐데요?'

'아니오. 말씀드렸다시피 전, 오늘 못 갈 것 같네요.'

'아, 네. 알겠어요.'

전화가 끊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를 건 인사부 직원의 태도에도 웃음이 나왔고, 회장이라는 사람의 스케줄 때문에 지원자에게 바로 전화해서 당일 2시간 안에 사무실로 다시 오라는 똥개훈련식의 면접에도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오늘 당장 오라는 협박식의 말투에도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히자마자 알겠다고 바로 전화를 끊는 행태가 딱 회사의 수준을 드러낸다는 점도 그냥 웃겼다. 결국 공식적으로 이 회사에서도 일할 기회가 없겠다는 예감이 들자 뭔가 속시원하면서도 동시에 더 불안해지는 이러한 양가감정이 드는 나 자신에게는 혐오감까지 들었다. 이게 갑질이 아니면 또 뭔가. 내가 을인게 죄지.

당연히, 나는 그날 낮잠은 물론이고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이곳 싱가포르에도 개념 없이 갑질만 하는 정신나간 기업들이 있다.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회사가 있으면 나쁜 회사가 있는 법이고 단지 나라마다 그 비율이 다를 뿐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곳은 노동법과 근로자의 권리를 지키는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에 나쁜 회사의 비율은 극소수이리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싱가포르로 구직을 위해 오는 취준생들은, 모든 싱가포르 내의 회사는, 한국보다 좋은 기업문화와 복지, 근무환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장밋빛 망상은 버리는 게 좋다. 대신 옥석을 가려내어 나와 잘 맞는 회사를 최대한 찾아내겠다는 지혜와 끈기를 갖추자. 그럼 3주 전의 나처럼 시간 낭비,감정 낭비는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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