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 회사의 마케팅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처음 마케팅 관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중학생 때였어요. 그때는 마케팅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기에, 막연히 광고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생각했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고요. 대학교에 와서야 마케터로 일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리고 취업 이후 쭉, 홍보/마케팅 관련 직무를 하고 있어요.
그래도 나름 일찍이 진로를 정했고, 일관성 있게 걸어온 셈인데요. 왜 몰랐을까요? 홍보와 마케팅이란 게 온통 글 쓰는 일 투성이인 걸요.
보도자료나 기획기사 쓰기, 광고 카피 쓰기, 홍보지 문안 쓰기, 브랜드 블로그나 소셜미디어 채널 콘텐츠 쓰기, 애드버토리얼 쓰기, 인터뷰 기사 쓰기, 회사소개서 쓰기, 대표이사 창립기념일 축사 및 신년사 쓰기, 임원 이름으로 나가는 칼럼 쓰기, 가맹점주 명절 선물 인사말 쓰기까지.
아, 다른 직무에서도 하시는 보고서나 기획안 쓰기는 당연히 기본 포함입니다. (물론 회사마다 마케팅팀의 직무는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회사 마케팅팀은 홍보 성격의 업무도 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마케팅 수업이 아니라 글쓰기 수업을 좀 들을 걸 그랬어요. 저 나름 학창 시절에는 글쓰기로 상 꽤나 쓸고 다녔거든요?
근데 밥벌이로 하는 글쓰기는 어나더레벨이더라고요. 드릅게 어려워요.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글쓰기의 괴로움과 무거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고, 생각보다 볼품없는 내 글쓰기 재주에 숱한 좌절을 맛보는 중입니다.
나처럼 '마케터=맨날 글 쓰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혹은 학창 시절 쓰던 글과 밥벌이로 쓰는 글의 괴리를 뒤늦게 알게 된 후배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글쓰기에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 글을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글쓰기, 어떻게 해야 더 잘하고 덜 괴롭게 할 수 있을지, 고민과 바람을 담아 보았습니다.
하나, 글 안에 '무엇을' 담을지 정하고 쓰면 좋겠습니다.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장이나 생각이 무엇인지, 즉 주제와 핵심 내용을 고심하고 정한 후에 글을 시작해야 해요. 글은 결국 생각을 담는 도구잖아요.
생각이 분명하지 않거나 충분하지 않으면, 글도 그렇게 나와요. 분량은 다 채웠을지라도, 뭘 전하려는 건지가 영 흐릿해 보이죠.
교사들이 글쓰기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개요표를 먼저 작성하게 하거든요? 주장문이라면 서론-본론-결론, 설명문이나 감상문이라면 처음-가운데-끝 칸에 들어갈 핵심 내용들을 짧게 써보는 거예요.
개요를 다 작성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글쓰기를 해요. 개요 각 부분에 적힌 내용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글을 써나가는 거죠.
어른도 똑같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숙련된 작가가 아니라면요. 학생들이 수업에서 배울 때처럼 정식으로 개요표를 작성하지는 않더라도, 이면지 쪼가리든 메모장에든 '무엇을' 쓸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으세요.
그것만 보고도 내가 완성할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대략 예상해 볼 수 있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회사에서 A상품 출시 보도자료를 작성하라고 하잖아요?
일단 주제는 뭐가 되어야 할까요? 'OO사에서 A상품을 출시했다?' 아니죠. 이걸 왜 배포하겠어요? 팔고 싶고 자랑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잖아요. 'OO사에서 출시한 A상품 엄청 좋으니 빨리 사'가 주제인 게 더 좋겠어요.
그럼 내용에는 뭐가 들어가야 할까요? 일단 'OO사에서 신제품 A를 ㅁㅁ일에 출시했다'는 기본적 정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엄청 좋다고 어필해야 하니까 특장점 두세 가지 정도가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이 제품을 샀을 때 어떤 이득이 얻는지(청소에 걸리는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아이 공부시키는 수고를 반으로 덜 수 있다 등등)도 특장점과 연결해서 언급하는 게 좋겠어요.
제품 자랑했으면 이제 사라고 해야겠죠? 'A상품은 어디 어디에서 구매할 수 있다' 혹은 '지금 구매하면 할인가로 살 수 있다' 이런 얘기도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쭉 나열해 놓고 그다음에 작성을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다 쓰고 나서는 메모해뒀던 메시지들과 비교하면서 퇴고를 합니다.
쓰려던 내용이 다 들어갔는지, 정한 주제가 잘 드러나는지, 주제나 핵심 내용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는 문장은 없는지 등을 확인하면 됩니다.
빨리 글을 써내야 하는 상황이라 이 과정을 생략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거 이해합니다. 일단 워드를 열고 제목부터 시작해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기에 급급하게 되잖아요.
그런데요. 이 과정 없이 나온 글은 어쩔 수 없이 티가 납니다. 뭘 쓸지 몰라 갈팡질팡했다는 게 보여요.
저는 그런 글을 들고 온 후배들에게 이 글의 주제와 핵심 내용이 뭔지 말로 해보라고 합니다. 그럼 글과 딴판인 말을 하거나 혹은 제대로 말을 못 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주제와 개요 잡는 것부터 다시 시킵니다.
기억하세요. 글보다는 말이 먼저고, 말보다는 생각이 먼저예요. 무엇을 쓸지 치열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글도 쓸 수 없어요.
둘, 기본적인 건 익히고 쓰면 좋겠습니다.
회사는 학원이 아닙니다. 회계 업무를 하는 직원에게 연산이나 엑셀 기능과 같은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듯이, 글 쓰는 업무를 하는 직원에게 글쓰기 기본기를 가르칠 수는 없어요.
물론 처음에는 잘 모르거나 못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게 계속되면 안 돼요. 절대로요.
만약 상사나 사수가 '한 단락에는 한 가지 내용만 넣어야지', '주어와 술어가 안 맞잖아요', '이건 복문이라 내용 해석이 중의적으로 되네요', '맞춤법 좀 틀리지 마세요', '앞에서는 A라고 하고 뒤에서는 B라고 하면, 논리가 안 맞잖아요' 등의 지적을 계속하잖아요? 기본기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는 겁니다. 부끄러워야 해요. 자괴감 느껴야 하고요.
그럼 글쓰기 기본기를 어디서 배우냐고요? 시중에 글쓰기 책 많아요. 사서 읽으세요. 그냥 훑어 읽지 말고요. 학습하며 읽어야 합니다.
제 경험인데요. 처음 글쓰기 책을 읽으면 많이 놀랄 거예요. 내가 그간 정말 잘못 쓰고 있었구나 깨닫거든요. 그 깨달음이 기본기 만들기의 시작입니다.
셋, 많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잘 쓰려면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도 워낙 책을 안 읽는 편이라 이 말을 부정하고 싶은데요. 너무 자명한 진리인 거 같아요.
안 읽으면 잘 안 써지더라고요. 그럼에도 독서 습관이 아직 몸에 배지 않은 관계로(;;), 대신 글 잘 쓰는 사람들의 칼럼이나 브런치글, SNS 토막글이라도 틈틈이 읽으려 노력합니다.
좋은 글(글쓰기 잘하는 사람의 글)을 읽는 게 쓰는 데 왜 도움이 되냐면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방법을 배우고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에요.
똑같은 주장을 담은 글이라 해도, 어떤 근거를 들어서 썼는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했는가에 따라서 설득력 있는 글이 되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글이 되기도 해요.
잘 써진 글을 읽으면서, '좋은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그 방법을 캐치해 내세요. 그리고 자기 글을 쓸 때 적용해 보는 겁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글을 전개하는 좋은 방법들이 내 손에 익어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이 읽는 게 도움 되는 이유 하나 더 얘기하자면요. 탁월한 문장, 비유, 명언 등을 수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유난히 자주 쓰는 단어나 비유, 표현이 있거든요? 그게 글에도 반영이 돼요.
근데 매일 똑같은 비유나 표현을 써먹으면 지겹잖아요. 생각을 드러내는 데 한계도 느끼게 되고요.
다른 사람들이 쓴 멋들어진 문장들을 수집해 놓으면,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될 때 참고할 수 있어요.
저도 평소에 문장 수집 노트를 쓰는데요. 최근에 수집한 것 중 두 문장만 소개할게요.
"뭐라도 하루 하나 하겠다는 마음이 행동으로 연결될 때, 일상은 새로운 무늬를 얻는다." (오은 시인, 경향신문 칼럼 中)
'일상은 새로운 무늬를 얻는다'라니ㅠ 나라면 '일상이 달라진다' 따위로 썼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일상에 새로운 무늬가 생긴다'가 아니라 일상을 주어로 해서 '새로운 무늬를 얻는다'라고 한 것도 너무 탁월하네요.
"유나에게 약속은 그런 것이었다. 하는 건 침 뱉기보다 쉽고, 지키는 건 그걸 다시 주워 먹는 것보다 어려운 일." (정유정 작가, 소설 <완벽한 행복> 中)
이것도 기가 막히죠?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유나가 약속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나아가 얼마나 무례하고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일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명문장들을 수집한다고 해서 그렇게 쓸 수 있게 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흉내 내는 시늉만으로도 변화는 일어날 것입니다.
넷, 어휘력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단어가 모여야 문장이 만들어지고, 문장이 모여야 글이 완성됩니다. 단어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최소 단위의 재료인 셈이죠.
요리든 인테리어든 써먹을 수 있는 재료나 소품이 많아야 완성도가 높아지잖아요. 글도 써먹을 수 있는 단어가 많아야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요.
'써먹을 수 있다'는 '안다'와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뜻은 알지만 평소에 글이나 말로 잘 안 쓰는 단어라면 써먹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닌 거예요.
글 쓰는 일을 하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텐데요. 글을 쓰면서 가장 답답할 때가, 머릿속에 생각이 맴도는데 그걸 꺼낼 수 있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예요.
고민하다가 대충 엇비슷한 느낌의 단어로 때우잖아요? 그럼 밋밋한 글이 나와요. 밋밋하기만 하면 다행이게요?
한 편의 글에서 같은 수식어가 몇 차례씩 반복되는 사태도 발생하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지루하잖아요.
듣기 싫고요. 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 써먹을 수 있는 단어를 많이 저장해둬야 합니다.
따로 시간 내서 어휘 공부를 하라는 건 아니고요. 기사든 책이든 읽을 때에 몰랐던 단어 혹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뜻을 말하기는 어려운 단어가 보이면 메모했다가 사전을 찾아보세요.
뜻과 예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단어를 알아가는 겁니다. 따로 단어장을 만들어서 배운 단어를 정리해두는 것도 좋고요. 배운 단어로 짧은 글을 써보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의식하고 글을 읽다 보면요. 몰랐던 단어가 참 많구나 느낄 거예요.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은 것도 많고요. 지금 제 단어장에는 위무, 눙치다, 미욱하다 등등의 단어가 적혀 있는데요.
평소에 책을 잘 안 읽어서 그런지, 책 한 권 안에서도 모르는 단어들이 수두룩이 나오더라고요ㅠ
다섯, 유행어를 남발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광고 카피나 스크립트, SNS용 콘텐츠를 쓸 때 많이 발생하는 일이죠. 저도 평소 드립 욕심이 있다 보니, 유행어를 종종 사용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유행어든 라임이든 내용과 착 붙거나 내용을 돋보이게 할 수 있어야 제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내용이 허술한데 유행어로 승부 보려고 하거나 맥락과 안 맞는데 억지로 껴놓으면 안 됩니다. 그럴 거면 그냥 안 쓰는 게 나아요.
여섯, 자신의 실력을 냉정하게 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직무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특히 글쓰기는 자기 실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거 같아요. 어쨌든 글도 창작물이니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니 더더욱 냉정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더 나아지려면 어디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야 하잖아요.
제가 첫 직장을 다닐 때 친구에게 제가 쓴 글을 보여줬었어요. 제가 썼다는 말을 안 하고요. '별로'라는 솔직한 평을 들었죠ㅋㅋㅋㅋ 충격을 받긴 했지만 정신이 번뜩 들더라고요.
돈 받으면서 쓰는 글인데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고요. 스스로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평가하기 어렵다면, 글 좀 읽는다는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 팩폭 당하는 것도 (정신 차리기) 좋은 방법입니다.
예전에 한 후배가 '회사에서가 아닌 평소에도 글을 쓰는지' 물었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기 한참 전이라 '아니'라고 답했고, '글쓰기가 싫다. 어렵고 지겹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브런치글을 씁니다. 잘이든 아니든 해온 게 이거고, 할 줄 안다고 할만한 게 이거더라고요. (자의로 시작했다기보다는, 지인의 강력한 권유로 시작하긴 했지만요;;)
글 쓰는 직무를 힘들고 재미없고 버겁게 느끼는 후배가 있다면, 이런 말도 해주고 싶습니다. 뭐든 일로 하는 건 다 그런 거 같다고. 그냥 잘하자는 마음으로 담대하게 하자고요. 이 땅의 글 쓰는 마케터들, 모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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