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다니면서도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어렸을 때 부터 아빠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정말 큰 내 자산이 되었다. 우리아빠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가족이니 많은 것을 알고 공유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쓰는 글에 어디까지 서술해야하는지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이 글이 아빠에게 또 우리 가족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니 조금만 써보아야겠다. (멀리 떨어져 산지 1년정도 되나보니.. 가족의 그리움은 점점 커져간다.)
얼마전 나에게 직장상사분이 지숙씨가 생각하는 지숙씨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예요?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망설임도 없이 ‘똑똑한 사람이요.’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세히 뭐 이야기 할 만한 진지한 시간은 아니여서 사실 나는 안타까운 천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만한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겠지?
결혼하기까지 28년동안 나를 키운 아빠에 대한 많은 기억을 어떻게 서술해야할까? 생각하다가 시간순으로 정렬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어렸을 때 나에게 똑똑한 사람인식된 아빠의 모습들, 그리고 안타까운 천재의 모습들을 나열해보려고한다. 가끔 아빠의 인생을 생각하면 20–21세기 현대 소설로 쓰여질만큼 다양한 스토리를 갖은 입체적인 인물의 인생이라고 여겨진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야기 부터 해야될것같다. 아빠는 4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958년에 태어난 가난한 가정의 모습은 똑똑한 아들들 중에 한명을 골라 대학을 보내야했다. 아빠 말로는 우리가 안동김씨 공주파 73대손에 이르는 집안이여서 스마트 유전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한번은 족보를 복사해와 나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이라는 것을 보여주신적이있었다. 용맹과 지혜로운 가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지만 아빠는 결국 중학교 졸업 후 학비가 없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다.
아빠는 항상 우리에게 패기를 강조했다. 도전해야한다라고, 아빠는 중학교를 졸업한 16살 나이에 1년동안 고사리 손으로 봉제공장에서 봉제일을 하였다고 한다. 할머니에게 본인이 학비를 모아서 고등학교에 간다고 하면 보내주겠다는 확언은 받고 시작한 아빠만의 계획이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 보다 1년 늦게 용산공업고등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하였다. 나머지 공고 학비는 대부분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아 다녔다고 한다. 그때 부터 아빠의 장학금 자부심은 우리를 항상 괴롭혔다. 나와 언니가 대학교를 다닐때 장학금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자극하였다. 가끔 그 동기부여가 떨어질때면 어디선가 주섬주섬 앨범을 꺼내 아빠의 장학금 인증서를 보여주곤 하셨다. 한번은 내가 성적장학금은 학년수석으로 받은적이있는데 그 소감은 ‘역시 우리딸은 내 유전자를 갖고 있었어!’였다.
그렇게 어렵게 공고를 졸업하였지만 아빠는 결국 대학을 갈 수 없었다. 난 아빠가 대학을 그 당시에 무리하게 갈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 부분이 정말 안타까운 천재라고 표현하게되는 대목이다. 아빠는 바로 일터로 뛰어들게되었고 공부를 소질이 있었던 세아들 중에 (그 당시 큰아빠는 음악과 풍류에 빠지셨다고 한다.아빠가 그 당시 큰아빠를 통해 들은 팝송들이 아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했다.그 영향은 나와 언니, 내 남동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막내 아들만 대학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아빠는 그 기회를 갖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빠는 17살에 봉제 공장에서 스스로 모은 돈으로 입학한 성공의 경험을 토대로 도전을 끊임없이한다.
그 큰 도전 중에 엄마를 만나게 된것도 포함된다. 아빠의 도전정신은 군인 신분인데 기차에서 책읽는 엄마에게 다음날 대전역에서 만나자는 인연을 만들어낸다. 엄마는 아빠가 그 당시 싫었다고 했지만 쫓아다니는 아빠때문에 나이도 한살어린데 속고 결혼했다고 한다. 아빠는 상병시절 간호사인 엄마와 기차에서 눈이 맞아 전역할때까지 많은 편지공세와 한살어린 나이까지 속여가며 (엄마는 닭띠, 아빠는 개띠이다.) 우리 외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된다. 당시 외할머니는 우리아빠의 모든것이 마음에 안들었다고 한다. 단, 하나 직장이 농협이라는 것 빼고 – 하지만 아빠의 도전정신은 그게 농협같은 그 당시 꿀직장이어도 아빠를 가둘 수 없었다고한다. 아빠의 말에 의하면 그 취업도 대뜸 농협에 찾아가 내가 이런 기술, 이런 기술이 있는데 농협직원으로 취업을 시켜달라고 요구했다고한다. 하지만 반복적인 업무에 실증이 나버렸다.
결혼 후 엄마를 임신했을 무렵 아빠는 현대건설에서 추진하는 중동건설 사업에 건축설계 기술자로 취업을 하게되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중동으로 해외취업을 꿈꾸었다. 아빠는 사우디에서 번돈을 엄마에게 붙이고 떨어져있는 동안 우리 언니가 태어났다. 아빠는 사우디에서도 대학졸업자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영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당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쑥쓰러워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많은 팝송을 듣고 자란 덕분에 또 아빠 스스로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그 당시에 유명했던 김성식 영어?!테이프 시리즈를 들으며 아빠는 현장 외국인들과 영어로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깨우친 영어기술로 아빠는 나중에 무역거래와 다음에 영어로 편지쓰기 카페까지 만들어 사람들에게 영어로 글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유럽여행을 혼자가겠다고 했을때 아빠는 나의 영어실력을 점검하고 종이를 뽑아주어 외국인들이 실제로 많이 쓰는 영어표현들을 알려주었다. 예를 들면 I want to drink water.라고 이야기하지말고 I would like to drink water.라고 이야기하고 뭔가 부탁할때는 could 로 물어보라고 알려주었는데 사실 아빠가 잔소리가 많아서 대충 듣는척을했지만 한달반동안 혼자유럽여행을 하면서 아빠가 알려준 would,could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해결할수있었다.
그렇게 아빠는 사우디의 현대건설 근무를 끝내고 돌아와서 현대건설에서 계속 일 할 생각이 안들었던것같다. 아빠가 표현하는 한국의 대기업은 ‘조직이 큰 곳에서 직원 한명은 기계의 한 부속품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야근이 인간에게 해로운 것이다, 주말 출근은 비상식적이다 라는 상식이 존재하지만 아빠가 일할 당시에는 그런것들이 없었다고 했다.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와 나를 임신할때쯤 챔프라는 중소기업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한다. 영업의 기술을 배워야 나중에 사업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였던 것 같다. 챔프라는 곳도 또한 학사이상을 뽑는 영업직 자리였지만 아빠는 농협을 취업했던 때를 떠올리며 1년동안 일을 시켜주면 아빠 본인이 학사학위가 있는 사람들 보다 얼만큼 더 많이 파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아빠는 진짜 1년동안 4년재 졸업생들보다 좋은 실적을 보여줘 그곳에서 좀 더 직장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사업의 꿈을 펼치기 위해 이를 접고 렌즈사업을 시작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쯤이었는데 집에 거의 다 다달았을때 무슨 공장에서 나는 냄새가 우리집 근처에서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리콘 냄새인지 아세톤 냄새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아빠는 거대한 솥같은데 아빠가 발명하는 렌즈 특허 등록을 위해서 온도 실험중이었다. 온 동네에 그 냄새가 퍼지는게 너무 민망하고 싫었던 기억이 있지만 아빠의 발명 열정을 우리가족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결국 아빠는 상표등록과 특허등록 등을 마쳐 그럭저럭 사업을 잘 해나가셨다. 방학때면 아빠가 발명한 렌즈들로 만든 보안관 (예전에는 티비브라운관 앞에 씌우는 유리가 있었다.), 선글라스 등등을 포장하는 일을 도왔다. 포장을 하면 아빠가 만원씩 용돈을 주셨는데 초등학생이 하는 파트타임치고는 꽤 큰돈이었고 그돈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많은 군것질을 사주었다. 친구들이 나의 용돈을 부러워했던 기억이난다.
희안하게도 아빠의 렌즈는 우리나라 IMF시기에도 잘 팔렸다. 우리집은 그렇게 부동산도 구입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아빠의 사업의 꿈은 점점 커졌고 이내 모든 돈을 일명 몰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홈쇼핑 케이블채널을 만들었다. 이름이.. 현대 홈쇼핑이였다. 지금의 현대홈쇼핑과는 다르다. 나중에 이렇게 홈쇼핑 사업이 거대해지고 아빠가 먼저 현대 홈쇼핑 상표등록했는데 왜 소송을 걸지 않았어? 라고 물어보니 아빠는 그런건 돈많은 기업끼리하는 상표권 싸움이라고 소송하는데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할 수 없다고했다. 아빠의 부푼기대가 담긴 홈쇼핑 사업은 뜻하지 않은 2002년 월드컵 호재에 맞물려 완전히 망하게되었다. 모든 채널에서 축구를 틀었고 홈쇼핑채널 자체의 시청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몇억은 순식간에 날라갔다. 그 당시 나의 기분은 참 묘했다. 우리나라 한일 월드컵응원을 친구들과 다녀오는 길 그 흥분은 집에 도착하면 싸늘한 공기와 맞물려 상쇄되었다. 그때 많은 돈을 잃고 우리는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게되었고 빚은 계속 불어났다. 한순간이었다. 난 그때 중3이었지만 자본주의가 어떤것인지, 한국에서 한번의 사업의 실패는 어떻게 한 가정을 변화시키는 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부터였다. 나의 천재아빠가 만약에 19살때 대학을 가서 아빠가 연구하고 싶었던 화학, 생명공학, 물리, 수학, 언어 등을 마음껏 연구하는 학자였다면 아빠는 아마 대단한 한국의 박사가 되어있지않았을까? 아빠는 인문학에도 뛰어났다. 내게 많은 철학과 시대사조, 역사, 심리학등을 알려주었고 취미로 시를 썼다. 아빠의 편지와 시들은 우리집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 글들을 읽을 때면 아빠가 어렸을 때 나처럼 더 공부 할 수 있었다면 한국의 한획을 긋는 예술가가 되었을까? 아니면 발명가가 되었을까? 얼마전 결혼하고 친정을 찾아갔을 때 이제는 희머리가 많아진 희끗한 머리를 한 아빠가 나에게 ‘지숙아 아빠가 또 이런 새로운 생각을 해봤다? 자동차 냉각기 문제인데… 이 냉각기 열을 내려주는 쉽고 기발한 방법을 생각했지. 한번 들어봐봐…’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마음이 참 찡했다. 말이 되는 소리이길 바라며 ‘아빠 내가 생각하기에 아빠는 지금 60살 다 되었지만 지금 대학에 가도 좋은 연구결과들을 낼 수 있을 것 같애. 내가 돈 많이 벌면 아빠 대학보내주고 싶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빠의 밍밍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야 뭐 이제 늦었지’ 라고 이야기했지만 거절도 아니고 긍정도 못하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직도 아빠는 공부를 하고 싶구나.. 그 마음이 느껴졌다.
아빠는 그렇게 짧은 시기에 많은 돈을 벌기도 잃기도했다. 그 경험을 거울삼아 내가 사업을 해보겠다고 쇼핑몰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지나고 보면 아빠가 무슨 말들을 나에게 왜 하였는지 이제서야 깨닫는 것들이 많다. 아빠는 너무 솔직하고 직설적이여서 나의 모난 부분을 칼로 베는 듯한 말들을 많이 하였다. “넌 홍보를 남사스럽다고 생각하는 구나. 아빠같으면 너의 쇼핑몰 주소를 새긴 티셔츠도 입고 다닐 수 있어!” 이말을 들을 때는 왠 잔소리야!! 이러다가도ㅠ맞아… 홍보는 남사스러운거야 소비자가 듣보잡 브랜드 옷을 살리가 없지! 내가 좀 더 남사스러워져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는 내가 생각 할만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에게 남겼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생때 한번 더 아빠가 만들었던 렌즈 사업을 중국에서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당시 우리집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아빠는 이번이 아빠가 재기 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셨다. 홀로 홍콩 등을 다니시며 비지니스 파트너를 만나셨고 영어로 메일을 쓰시는 모습을 몇번 볼 수 있었는데 그 뒤 아빠는 이년 정도 중국의 공장장으로 가셨다. 중국 투자자들은 아빠에게 호의적이여서 복지 사항으로 언니의 대학 등록금도 내주는 등 적극적으로 아빠에게 잘 해주었다. 아빠는 한국과 다른 중국 업무 문화에 불만이 많으셨다. 우리나라사람들 처럼 시키는 일을 끝까지 제대로 안해놓으신다고 엄마랑 통화하는 이야기를 수화기 넘어로 들을 수 있었다. 결국 투자 기한내에 아빠가 약속한 렌즈를 생산하지 못했다. 중국사람들은 실망했고 무서운 방법으로 아빠의 원천기술을 얻기위해 협박했다. 아빠를 급기야 감금하려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는 아빠를 다시 한국으로 급하게 들어오길 요청했고 그렇게 중국의 원대한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빠는 중국어를 말할수있게 되었다. 중국어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번 읽었다고 하셨다. 급하게 나오는 상황에서도 아빠는 중국어 사전은 들고나오셨다. 빼곡히 필기가 된 아빠의 중국어 사전을 보고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아빠는 가끔 중국의 공장멤버였던 친한 친구분과 중국어로 통화를 했다.
중국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생산하지 못한 아빠의 특허렌즈를 한국에서 한번 더 도전하지만 결국 투자자와의 불화로 이것도 물거품이된다. 이때부터 암흑기가 시작된다. 그 당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있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용돈을 과감하게 받은 것도 몇번있었다. 100만원, 200만원을 뭉탱이로 받고 열심히 관리해보라 하신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성인이 된 나에게 부모님은 알아서 생활비를 충당 할 줄 알아야한다고 가르쳤다. 그때 부터 나는 정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KT 전화 상담, 전단지, 과 사무실 보조, 등이었다. 세번의 연거푼 사업의 실패는 아빠가 이겨내기 힘든 무기력과 피해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예전에 딴지일보에 실린글을 보았는데 IMF시대에 이혼을 겪은 흔한 가정들에 대한 글이었다. 난 주변 친구들 중에 사업하는 아빠를 둔 친구들은 거의 나와 비슷한 경험이 한 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부터 우리나라는 소상공인이 왜 쉽게 망하는가?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많았고 그때부터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소상공인을 보호하는지, 중소기업을 보호하는지 알고 싶어 국제뉴스를 자주 보게되었다.
아빠가 사로잡힌 피해망상 중에 하나는 아빠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도 있었다. 아빠에게는 안타깝게도 아빠의 철학, 과학상식, 역사의식, 사업아이디어 등을 나눌 친구가 없었다. 유일한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엄마이다. 사실 아빠가 대학을 가게되었다면, 교회를 다녔다면 그 모든 아빠의 신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나눌 장이 있었겠지만 교회는 다니기 싫어하시고 대학은 그 당시 재정적인 상황때문에 불가능했다. 아빠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여러가지 아이디어로 특허를 항상 준비하셨다. 아마 보유하고 있는 특허가 10개는 넘을 것 같은데.. 사실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반려된 것, 심사 중 인것, 의장등록 등 추가 비용을 내지 못해 홀딩 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아빠의 이런 과학자의 열정을 제대로 받아 줄 수 없었다. 아빠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영화에서나 보던 과학에 미친 사람처럼 새벽 2시든, 3시든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어했다. 매번 꽂히는 주제는 달랐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언니는 결혼해서 독립하였고, 동생은 군대에서 복무 하느라 엄마와 나, 아빠 이렇게 셋이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나도 결혼준비를 하던 터라 아빠와 대화를 할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아빠와 가장 최근에 한 과학 아이디어의 주제는 에너지였다. 아빠는 항상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이 주제에 대한 대화는 5년전이었다. 얼마전 아빠가 말한대로 모든 에너지(소리에너지, 운동에너지, 빛에너지 등)가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어떨까? 그때 잠시 수소 에너지 베터리에 대해서도 나에게 설명을 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에너지가 생기고 나서 물만 남는다는 아빠의 말을 흘리듯 지나쳤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빠가 이야기한 모든 에너지가 순환되는 미래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빠지게 됐다. 아빠는 이런 생각들을 항상 머리 속으로 하다 집에와서 엄마와 우리에게 이야기하였다. 엄마는 기독교 철학과 인체과학에 관심이 많아 아빠와 대화가 잘 통했다. 원리 중심의 설명을 하는 아빠의 대화는 가끔 정말 어렵다. 그 대화에 훈련된 엄마도 참 지혜로운 여자이다.
아빠는 사업의 실패로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지만 샘솟는 아이디어의 샘을 막을 수 없었다. 30년전 사우디에서 유럽, 미국 사람들과 영어로 일을 한 경험때문일까? 안동 김씨라는 성씨가 신라시대부터 많은 왕의 자리, 다양한 벼슬의 자리를 많이해서 그런 유전자 때문일까? 어렸을 때 아빠가 흔하게 듣던 팝송(아빠의 큰형께서 많은 팝송 테이프 혹은 LP판을 가져와 틀어놓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 큰집에 가면 많은 LP판과 턴테이블, 큰 스피커가 있던것이 기억난다.)때문에 일찍이 다양한 문화에 눈을 떠서 인가? 중국에서 2년 정도 공장장으로 일한 경험때문일까?
아빠는 그렇게 다시 한번 재기 할 기회를 엄마를 통해 잡게 된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없으면 안되는 에어컨설치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계신다. 에어컨을 이고 지고 가는 아빠의 굽은 허리를 보며 세월이 많이 지나 깨닫게 된 것은 아빠는 사업을 하여 정말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가족들을 호강시켜주고 싶어하셨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어린 마음에 아빠는 사업을 망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농협, 현대건설, 챔프, 선라이즈, 현대 홈쇼핑 등을 거쳐 오케이 에어컨의 사장님이 되기까지 아빠는 많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욕구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아빠가 보여준 세상을 좀 더 낫게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왜?’라는 질문속에서 보여준 특허를 만들겠다는 끊임없는 지구력 등의 영향력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아빠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다. 같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빠 왜 미국이 러시아를 저 때 싫어했어?’ ‘아빠 왜 저 물고기는 바닥에만 있으려고 하는 거야?’ ‘아빠 왜 이런거야? 저런거야?’ 아빠는 또 나에게 ‘너는 왜 혼자 유럽여행을 가려는 거야?’ ‘너는 왜 결혼을 하려는거야?’ ‘너는 왜 사업을 하려는거야?’ 등을 물어보면 나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여야 했다. 아빠와 엄마를 설득하고 나면 나의 결정을 지지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보편적이지 않을 때 나를 혼자 유럽여행을 보내실때도 나의 목적을 듣더니 흔쾌히 보내주셨다.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티셔츠 포장은 엄마가 도와주고 스티커 제작은 아빠가 도와주셨다.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을 때 아빠는 ‘너는 정말 너의 남편된 사람을 사랑하고 평생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니?’라고 몇번이고 물었다. 나도 내 스스로 그런 확신이 정말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고 확신있는 대답으로 ‘응, 나 정말 이 사람 사랑하고 평생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라고 이야기했다. 아빠는 ‘그럼 됬다. 너의 행복이 부모의 행복이고 아빠는 새로운 아들이 한명이 생겼구나.’라고 대답했다. 우리 집은 참 대화가 많은 집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아빠는 내 후년에 환갑이라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어렸을 때는 항상 최신기기를 구매해오시는 멋진 아빠였다. 우리는 컴퓨터가 천리안이었던 시절부터 아빠가 구매해온 386컴퓨터로 인터넷도 해보고 아빠가 게임을 까는 법부터 아래 한글에서 문서작성하는 법까지 알려주셔서 게임도 원없이 해보고 (고인돌, 원숭이섬의 비밀, 스타크래프트, 판타스틱 아일랜드 — 시간의 이정표 등) 윈도우 디스크가 들어가던 시절에 컴퓨터 포맷하는 것 까지 아빠는 모르는게 없는 척척 박사였다. 핸드폰이 출시되면 핸드폰의 사양을 비교해서 엘지와 삼성 중에 가격대비 어떤 것을 구매하는 것이 현명한지 알려주고 추천해주던 아빠였다. 하지만 어느새 부턴가 점점 내가 아빠보다 익숙한 물건들 서비스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사를 가게되면 인터넷사들을 비교해서 설치하고 사은품을 받는 것, 컴퓨터를 포맷하는 것, 아빠의 핸드폰이 이상해지면 봐드리는 것, 작은 글씨가 안보이셔서 내가 대신 읽어주는 글들이 생기는 것 등 점점 내가 아빠보다 잘하는 것들의 갯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대가 바뀌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때 마다 지난 나의 유년시절의 아빠와의 추억들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패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르던 그 시대에 아빠는 가장 현명한 패미니스트였다. 여자여서 못하는 것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팩게임이면 게임, 컴퓨터면 컴퓨터, 롤러브레이드 타는 법, 자전거 타는 법, 카세트테잎, CD플레이어, MP3에 노래넣는법, 디지털카메라 사용법 등을 가장 먼저 언니와 나에게 알려주었다. 내 동생은 나와 여섯살 언니와 10살 차이가 나서 좀 더 커서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내 동생을 알아서 여러가지를 잘 하였다. 실험정신이 남다른 동생은 10년전 페이스북에 가입하고 트위터에 가입해 자기가 오바마와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당시 나는 트위터가 생소했는데 중학생이었던 동생은 벌써 소셜미디어를 알았고 게임블로그를 운영해 방문자수를 늘리기도 하는 등 남다른 재주가 많았다. 나의 남매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글로 써보아야겠다. 이렇게라도 해야 멀리서 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와의 대화는 나를 많이 성장시켰다. 아빠가 왜라고 묻는 질문에 나는 때론 그 대답을 하기위해 오랜 시간을 고민하기도 하였다. 아빠는 답을 가져올 시간을 종종 몇일씩 주기도 하였다. 나도 나중에 아이를 키우게 되면 많은 질문과 대답을 듣고 싶다.
이상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다음에는 엄마에게 받은 영향에 대해 써보아야겠다. 아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아주세요!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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