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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내 시간이 시작된 듯했다. 아무래도 회사에 있는 시간은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해야만 하는 일로 가득하니까.

 퇴근 후의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흘러간다. 쳇, 회사에선 그렇게 안 가더니. 내일을 위해 잠들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 너무나 소중한 것. 느긋하게 행동했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바로 잠을 자야 한다. 꼭 무엇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기껏해야 다운로드해둔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 쇼핑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마저 안 하고 잠을 자면 왠지 억울하고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해야 하는 일만 하다가 하루가 끝나는 게 되니까.

 아, 벌써 자야 할 시간이네. 자기 싫어도 자야 해. 지금 자야 내일 일하러 가지. 채워지지 않은 헛헛함을 안고 잠이 든다.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퇴사도 했으니 당장 어디론가 떠날 수 있지만 떠나지 않았다. 배낭에 짐을 챙겨 100일 정도의 일정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갈 법도 한데(다들 퇴사하면 그러니까, 하마터면 나도 떠날 뻔했다) 막상 퇴사하고 나니 귀찮기도 하고 떠나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사실 여기서 못 찾은 '나'가 저기 멀리 있는 나라에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가고 싶으면 그냥 가서 재미있게 놀면 되지 왜 거기서 나를 찾아야 하는 건지. 그렇게 뭔가 느껴야 한다는 강박으로 하는 여행이 재미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우리가 너무 목표지향적인 삶에 길든 탓일까. 여행은 나중에 떠나고 싶어 지면 그때 떠나는 걸로. 지금은 아니다. 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다. 아무튼.

 그렇게 소원하던 내 시간이 많아졌으니 이제 하고 싶은 것들을 알차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웬걸. 별거 안 한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떠나고 싶고, 뭐라도 하고 싶어 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니 이제 와서 무슨 개떡 같은 소린가. 나도 가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진짜 원하는 걸 모르고 헛된 것들로 허기를 채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대낮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날이 어둑해진다.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린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예전 같으면 아까워서 뭐라도 했을 시간을 이렇게 막 쓰고 있다. 평생 낭비라는 것을 해 본 적 없는 내가 마음껏 낭비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낭비는 인생 낭비만 한 게 없다.

 누구 하나 잔소리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도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 만인가.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뭔가 충만한 기분이 든다. 하루를 나를 위해 온전히 쓴 것 같은. 낭비가 아니라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영원히 이렇게 사는 건 좀 문제가 있다. 나 역시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원하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은 이러고 싶다.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방전되었던 모양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하려고 애쓰는 동안 다 써버린 에너지를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다시 채우고 있는지도. 나는 지금 충전 중이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증상이 있다. 충분한 휴식 없이 너무 달리기만 하다 보니 정신적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리고 무기력과 우울, 자기혐오 등에 빠지는 증상이란다. 번아웃 상태까진 아닐지라도 우리 대부분은 에너지가 간당간당하다. 가끔 휴식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지만, 터무니없이 짧다. 당연히 귀한 휴식이니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제대로 된 계획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또 애쓴다. 쉬는 동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완전히 에너지가 소진되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발적 백수가 되었던 경험이 있다. 푹 쉬면서 충전할 생각이었는데 충전이 잘 안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낭비라 생각했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뭘 했냐고? 고민을 했다. 그 많은 시간을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채웠다. 그것을 노력이라 착각하면서. 결국, 마음을 편하게 갖지 못하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인간은 뇌의 95퍼센트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쓴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 고작 5퍼센트의 뇌로 살고 있으니 지칠 수밖에. 방전된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더'하는 게 아니라 '덜'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좀 덜 하고, 노력도 좀 덜 하고, 후회도 좀 덜 하면 좋겠다. 마치 오늘만 살 것처럼. 지금은 충전 중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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