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야구 어떤 팀 응원하냐?”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내게 물었다. 그랬다. 야구 시즌이었다.
“전 응원하는 팀 없는데요.”
“뭐어?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단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릇 남자라면 응원하는 야구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만 나는 없다. 왜냐고? 야구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야구뿐인가. 나는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는 것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적인 경기 정도는 애국심으로 볼 법도 한데 그것도 별 관심이 없다. 아무래도 애국자는 못 될 인간이다.
스포츠는 정면승부의 세계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피하거나 속이지 아니하고, 오직 갈고닦은 실력만으로 정정당당히 승부하는 선수들의 모습에선 어떤 고귀함까지 느껴지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승패를 겨루는 것에 심드렁하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도박이나 게임에도 관심이 없는 걸 보니 정말 이기고 지는 것에 흥미가 없는 모양이다. 왜 이러는 걸까.
내가 승패에 흥미를 잃은 건 '승'보단 '패'를 더 많이 겪으며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슬프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졌다고 할까. 아무튼, 나처럼 승부에 약한 인간은 아예 승부를 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그래서 승부와 관련된 것이라면 일단 외면하고 본다. 정말이지 그 누구와도, 그 무엇으로도 겨루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경쟁이나 승부 같은 건 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이렇게 승부를 피한다고 피하는데도 이상하게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다.
“넌 한 달에 얼마 버냐?”
명절 때가 되면 꼭 이런 질문을 하는 친척들이 있다.
이런 질문은 유독 남자 보는 눈이 없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고모의 남편, 즉 ‘이번 고모부' 같은 사람에게서 듣게 되는데(내 고모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겁니다, 에헴),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나도 모르게 수입을 공개하고 나면 그는 금세 나에게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왠지 모를 패배감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수입이 너무 적은 것 같아 조금 불려서 말해 상처는 더욱 깊다.
땡땡땡! 어느새 시합은 끝나 있었다. 링 위에 선지도 몰랐는데 이미 KO 당하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경험은 살면서 수도 없이 반복된다. 내가 원치도 않았고, 내가 잘하는 종목도 아닌데 느닷없이 경기는 시작되고 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진다. 참 서글픈 일이다.
사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남들의 평가에 패배감을 느낀다는 건 나 역시 그걸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일 거다. 어쩌면 나부터가 간절히 원하는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가지지 못했고, 겉으론 그것이 없어도 괜찮은 척했지만, 남이 그것을 일깨워 주자 패배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열등감. 승부는 이미 내 안에서 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열등감이 없다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니까. 괜히 애꿎은 고모부를 미워할 뻔했다. 아차, 거듭 얘기하지만 내 고모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사람에겐 여러 가지 면이 있지만 제일 비교하기 쉽고 눈에 띄는 것으로 평가는 이뤄진다. 재력, 외모, 학벌, 스펙…… 솔직히 나도 그런 기준들로 타인을 평가해 왔음을 고백한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 내가 그런 기준으로 평가받는데도 할 말은 없다. 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저는 측면이 더 괜찮아요. 정면 말고 제발 그 면을 봐주세요!'라고 외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나부터가 남들의 측면을 보려 하지 않으면서 내 측면을 봐달라 하고 있으니 이처럼 한심한 작자가 있나. 정면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다면 나부터 남들을 그것으로 평가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결국 타인을 향한 잣대는 돌고 돌아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므로. 그때 느낄 패배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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