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조언과 아포리즘의 천국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그리고 말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조언과 팁과 명언이 항상 풍부하다. 그래서 아무말 대잔치나 드립, 일침이라는 단어는 이런 상황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디자이너로 세상을 살다가 보면, 스타트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된다. 디자인은 제품의 개성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환경을 선호한다. 그런데 스타트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유독 '본질'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스타트업은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본질에 집중해라. 누구는 본질에 집중해서 성공했다. 이런 말이 정말 많이 들린다. 그런데 본질을 어떻게 찾는지,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글은 많지도 않고, 있어도 모호하다. '숟가락이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면, '젓가락 옆에 있습니다.', '젓가락이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면, '숟가락 옆에 있습니다.'라는 식이다.
사람들은 디자인 결과물에 대해서 논평할 때, 여러 가지 의견을 내고, 여러 가지 방향을 이야기한다. 그럴 때, 디자이너가 설명을 하면, 이렇게 반문한다. '지금 디자인은 그렇지 않잖아요?' 디자인에는 단계가 있고, 디자인에 대한 지적에 대응해서 아직 초안이라고 말하거나, 좀 더 내용이 보강되면, 디자인이 나아질 것이라는 항변을 많이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항변에 실망한다.
디자인을 평가할 때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본질에 대해서 말할 때는 이상적이 된다. 안타깝게도 본질은 현재의 결과물을 넘어서지 못한다. 제품은 사람의 아이가 아니다. 제품은 스스로 성장하지 않는다. 혹시 나중에 AI를 제품으로 만들고 있는 회사의 경우엔 예외겠지만, 현재의 결과물이 본질이다. 지금의 결과물이 엉성하다면, 본질도 엉성한 것이다. 제품을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고, 그마저 별다른 효용이 없다면, 그 본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디자이너가 천상의 디자인을 상상했는데, 디자인 결과물이 별로라면, 그 상상은 망상일 뿐이다.
본질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제품은 이상적인 본질의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 제품도 잘 만드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한 과정을 밟고 시장의 좋은 평가를 받은 브랜드와 제품을 자신들이 만든 제품과 동일하게 상상한다.
상상은 자유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혹독하다.
스타트업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사실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기업의 시간은 항상 제한되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시간이라는 제한에서 가장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타트업은 분기별 이익을 생각해야 하고, 승진과 부서별 힘의 균형과 상사의 압박이라는 제품과 연관이 적은 스트레스를 짊어져야 하는 중견 기업보다 더 좋은 환경이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에서 제품은 코드다. 따라서 프로그래머가 가장 핵심이다. 디자이너는 프로그램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고 사람들이 이해하는 과정에서 동기를 갖게 하고, 제품을 사용하는 과정이 그들의 삶을 좀 더 좋은 상태로 이끌어준다고 설득하는 사람이다. 메시지의 순서를 만들고,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90년대 어떤 일간지의 한 구석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외국 CEO의 인터뷰였다.
"한국의 기업 웹사이트의 첫 번째 메뉴는 왜 항상 '회사 소개'이고, 그 회사 소개는 왜 기업의 연혁과 구조,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기업 웹사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입니다."
스타트업은 회사라는 생각에 기업문화를 만들고, 비전을 만들고, 모토를 만드는 것은 좋다. 하지만 좋은 프로그래머를 불러오는 것을 좋은 프로그램이고, 좋은 디자이너를 불러오는 것은 좋은 디자인이다. 제품을 개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제품은 눈 앞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다. 그리고 결점이 보인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글은 짧고 모호한 글과 강력해 보이는 단어다. 인터넷 이전 시대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채널이 적고 조악할 때는 글이 짧아도 그걸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생각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짧은 글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짧다.
본질은 Nature, Essence 혹은 See the fuking truth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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