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배울 것은 늘어난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제3의 물결'(앨빈 토플러, 1980)을 지나 '생각의 속도'(빌 게이츠, 1999)를 거쳐 제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 2016)까지 왔다.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한 사람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웹페이지를 만드는 것도 다양한 해상도와 플랫폼, 소비자와 사용자를 고려해야 한다. 기술이 사람보다 빠르고, 시장은 회사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속도는 제작 환경에도 큰 혼란을 주고 왔다. 기존의 기획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관계는 기획자가 소비자에게 공급할 상품을 시장에 맞춰 기획하고, 디자이너가 그래픽을 만들면, 개발자가 개발하여 시장에 공급되는 구조였다. 컴퓨터의 기능이 발전하고 개발에 관련된 소프트웨어가 발전하면서 효율성이 높아지고,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문화되었다. 그리고 직군 간의 권한과 책임은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커지면서 권한과 책임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개인의 역량에 따라 기획자 혼자 디자인을 할 수 있고, 디자이너가 개발자가 되고, 개발자가 기획과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한계가 확장되면서 중견 기업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의 사람으로 시작되는 초기 기업의 형태인 스타트업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풀 스택 개발자라는 말이 소셜 미디어에서 퍼지더니 이제는 풀 스택 디자이너(Full Stack Designer)라는 말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전설의 디자이너, 그 이름은 Full-Stack
나는 기획자 없이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퍼블리싱하고 올리기도 하고, 모바일 앱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출시 지속적으로 디자인을 업데이트하고 기능을 설계하기도 했다. 명함과 로고, 인쇄물을 만들고, 소셜 미디어 홍보용 동영상과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 나는 풀 스택 디자이너인가? 아니다. 지금의 환경에서는 누구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풀 스택 디자이너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생각을 글, 이미지, 제품으로 만들어내고 확장할 수 있는 디자이너다. 여기에는 신입과 경력의 구분이 필요 없다. 연차보다는 경험의 질이 중요하다.
회사의 목표는 합리적인 비용으로 고도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쟁자보다 빨리 신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직군은 세분화되고, 전체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비용을 지출했다. 그런 관점에서 풀 스택 직군은 적은 관리 비용과 인건비로 높은 전문성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UX, UI, HTML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홍보와 브랜딩, 차기 제품의 방향성까지 잡으면 최소 2~3명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착각하기 쉽다. 풀 스택 디자이너는 재능의 백화점 혹은 스위스 군용칼 같은 만능 도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고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사람들은 AI가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제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서 이 걱정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연필깎이가 연필 깎는 사람들을 실직시키고, 복사기가 공문서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을 실직시키고, MS의 소프트웨어, 엑셀이 회계사들을 실직시킨 것처럼 아직 등장하지 않는 어떤 AI가 누군가를 실직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매년 AI 학계에서는 '튜링 테스트(Turing Test)'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1950년 튜링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시작했다. 이 질문은 언젠가 그런 기계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뢰브너 상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의 규칙은 기계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는 상대와 5분간 채팅으로 대화를 나눈 후, 10분간 생각하고 상대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맞혀야 한다. 기계가 이기면 '가장 인간적인 컴퓨터'라는 타이틀을 받고, 인간이 이기면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받는다. 2009년 대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 타이틀을 받은 브라이언 크리스찬은 인간은 연속된 하나의 삶을 살아온 결과로 일관된 정체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며,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풀 스택 디자이너나 개발자 혹은 기획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 기계에 가깝게 일하도록 강요했다. 이제 기술은 한 사람의 능력을 온전히 도와줄 수 있게 발전하기 때문에 효율성이 중요하지 않다. 더 인간적인 작업물이 중요하다. 현대의 사람들은 직접 농작물을 기르지 않고, 밥을 하지 않고, 옷을 만들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시간에 더 하고 싶은 일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과 쉽게 대화할 수 있다. 귀찮은 일을 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AI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풀 스택의 진짜 능력은 이야기
배달의 민족은 최근 자주 거론되는 성공한 기업 중 하나다. 배달의 민족이 디자인하는 것은 앱의 UI나 웹사이트의 디자인이나 홍보물이 아니라. '이야기'와 '맥락'이다. 동일한 기능, 동일한 시장, 동일한 사용자를 두고 경쟁할 때, '이야기'와 '맥락'은 기능의 완성도를 초월해서 사용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다. 배달의 민족은 맥락을 디자인한다. 배달의 민족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배달의 민족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많이 공개하는 편이기 때문에 배달의 민족이 벌이는 캠페인의 메시지는 재생산되고 널리 퍼진다.
디자이너의 경우에는 디자이너를 한 명의 인격이 아니라 포토샵 같은 툴과 묶어서 생각하고, 회사의 의사결정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회사에 끼워 넣는 부품이나 기능이 아니다. 그래서 편한 의자, 마음껏 쓸 수 있는 카드, 고가의 최신형 장비보다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지가 중요하다.
포토샵은 물론이고, 스케치도 잘하고, 재플린도 잘 쓰고, HTML로 목업도 잘 만드는 어떤 디자이너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진짜 능력은 스킬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맥락을 잘 이해하고 계속 이어나가며 남들이 생각하고 편견의 벽을 넘고 있는 사람이다. 툴은 말 그대로 도구일 뿐이다. 도구는 점점 쓰기 쉬워지고 도구 간의 연계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를 구할 때 중요한 것은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개성이고, 그 사람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다. 특히 지금처럼 하나의 사업모델을 여러 가지 채널로 확장해야 하는 경우라면, 맥락과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있는 보이지 않는 능력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피터 드러커는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자란다.'라고 말했다. 작가 닐 게이먼은 자신의 작품인 샌드맨에서 '꿈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꿈은 사람을 존엄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없다면, 동기가 생기기 힘들다. 사람을 기계처럼 만들고, 기계를 사람처럼 만드는 세상이다.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