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상륙하다
2018년 9월 15일 최대 295km의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 '망쿳'이 필리핀을 강타했다. 그리고 같은 날 연매출 15조 원의 세계 1위 스포츠레저용품 전문 브랜드가 인천 송도에 상륙했다. 1976년 프랑스에서 시작해 전 세계 49개국에서 1,500개 이상의 매장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스포츠 백화점'으로 널리 알려졌다. 왜 '스포츠마트'도 아닌 '스포츠백화점'이냐고? 이 곳은 매장의 평균 사이즈가 약 1,200평에 달하고 등산, 사이클 등 최대 80여 스포츠 브랜드를 입점해 운영한다. 이 정도 규모면 매장에 없는 스포츠용품을 찾는 게 더 어렵다.
이 기업의 이름은 데카트론이다.
데카트론은 그리스어로 '10개의 스포츠'를 뜻하는데 소비자들에게 적어도 10개의 스포츠를 전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데카트론은 1976년 프랑스 릴에서 창립했다. 오랜 역사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데카트론이지만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아직 낮은 편이다.
자율화가 곧 혁신이다
데카트론은 직원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는데 직원들이 활기가 넘치고 적극적이다. 이유는 캐셔부터 지점장까지 포지션을 막론하고 애초에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 채용하기 때문이다. 이전 디즈니 관련 글에서 직원들을 '캐스트멤버'라고 부른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데카트론에서는 매장 직원들을 '스포츠리더'라고 부른다. 디즈니의 캐스트멤버들이 극 중 연기자처럼 자기가 맡은 역할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을 보고 리허설까지 해야 했다면 데카트론의 '스포츠리더'들은 골프, 암벽등반, 축구, 농구 등 각자 맡은 분야의 강습이 가능한 전문가이다. 그래서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에게 '실전 팁'을 주기도 하고 요가, 사이클 등은 정기적인 수업을 개최한다. 그리고 데카트론에서 꼭 사야 하는 제품 중 하나로 뽑히는 '이지브레스' 스노클링 마스크의 경우, 평소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데카트론 직원의 아이디어로 개발된 상품이다.
또한, 스포츠리더는 자기가 맡은 스포츠 분야의 제품을 직접 선택하고 진열한다. 예로, 스포츠리더의 판단 하에 많이 팔리는 제품은 더 재고를 확보한다. 이를 위해 데카트론은 R&D센터와 생산 공장을 한곳에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에 위치시켰다. 예로, 트레킹과 크리켓 용품은 히말라야와 맞닿은 인도에서, 배드민턴은 중국에서, 설상 장비는 스위스 설산에서, 수상 장비는 이탈리아 해안가에서 개발하고 만든다. 이를 통해, 각 제품에 쓰이는 특수 원재료 가격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다. 또한 각 지역에서 인기 있거나 특화된 제품을 현지에서 생산하기에 해당 지역의 고유 스포츠에 최적화된 물건을 개발할 수 있다. 이렇게 데카트론은 각 지점의 스포츠리더들의 손에 의해 지역에 최적화된 매장으로 진화한다.
마케팅보다 가격이다
광활한 매장을 가득 채우는 제품들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왜 마케팅을 조금 더 공격적으로 하지 않는 걸까? 개당 1천 원 이하에 판매하는 아이스크림도 손흥민을 모델로 쓴다. 반면 일반 식료품 대비 가격대가 높은 카테고리를 보유한 데카트론은 왜 마케팅에 적극적이지 않을까? 답은 데카트론의 경영 철학에 있었다.
데카트론은 고객의 스포츠 경험을 가장 최우선시한다. 이를 위해 마케팅 비용을 최소화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케팅으로 승부하기에는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규모를 따라갈 수 없다. 2018년 한 해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각 4조 원이 넘는 비용을 마케팅에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마케팅 관련 비용이 매출의 15%를 넘지 않는다. 데카트론이 나이키와 아디다스에 준하는 마케팅 활동을 할 경우, 전체 매출의 30%에 가까운 비용을 마케팅에 할애하게 된다. 대신 데카트론은 가격을 최대한 소비자 친화적으로 형성하고 제품 개발에 투자한다. 데카트론에 입점한 80여 개 브랜드 모두 데카트론의 'Private Label' 자체 브랜드이다. 제품 설계, 디자인, 생산부터 운반, 판매까지 직접 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체험을 판매하다
2019년 11월 발표한 500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92%가 체험 마케팅이 판매와 마케팅에 필수 요소라고 답했다. 소비자의 구매 채널이 온라인으로 바뀌며 오프라인 매장이 상품 유통의 통로에서 브랜딩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상품 판매보다 경험 제공에 비중을 두는 체험매장들이 속속 들어서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체험 매장은 잠재 고객에서 호감과 신뢰를 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바이럴이 되도록 유도한다. 국내 진출 1호 매장인 송도점은 7800㎡ 규모이다. 축구장 1개의 면적이 7140㎡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일 매장 치고 상당히 크다. 데카트론이 굳이 넓은 매장을 고집하는 이유는 체험존을 최대한 설치하기 위해서다. 매장 옥상에는 국제표준 규격의 풋살장이 있고 매장 입구 옆에는 농구장, 스케이트존 등을 갖췄다. 매장 내엔 암벽등반 기계, 스크린골프시설, 간이 배드민턴 코트, 복싱장, 요가나 헬스 트레이닝 수업이 운영되는 체육관도 따로 있다.
모든 시설은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매장 운영시간 중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고객은 제품을 사기 전에 직접 시험을 해볼 수 있고, 즉시 환불 제도를 통해 제품을 구매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환이 가능하다. 데카트론이 이렇게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의 체험을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는데 타사들은 어떠한 전략을 취하고 있을까?
최근 리테일의 트렌드는 'Digitalization'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트렌드를 정확히 포착한 아마존과 같이 디지털을 레버리지하여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가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케아의 경우, 매장에서만 볼 수 있던 가구를 증강현실(AR) 기술이 탑재된 앱을 통해 매장이 아닌 곳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출시 2년 만에 200만 명이 앱을 설치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화장품 브랜드 AHC의 경우, 명동의 기존 매장을 플래그십 스토어로 리뉴얼했다. 매장의 대부분 공간을 뷰티 관련 영상이 상영되는 미디어월과 피부 테스트존 등으로 구성했다.
AHC는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공간에서 제품에 대한 긍정적인 체험을 통해 잠재적 소비자들이 실질적 소비자로 전환된다고 믿었다. 나이키는 일찍이 디지털 스포츠 사업부를 만들고 디지털 혁신을 준비했다.
나이키 매장의 모든 제품에 QR코드가 있어서 나이키 앱으로 스캔 시 색상과 사이즈 등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인터랙티브 윈도우 등을 활용한 디지털 인스톨레이션을 통해 경험 마케팅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데카트론의 'Digitalization'은 필연적이다
현재 아디다스와 나이키의 오프라인 매장과 비교하면 데카트론의 매장은 상당히 아날로그틱하다. 넓고 쾌적하고 친절한 스포츠리더들이 있지만 비교적 트렌드에 민감한 Z세대와 밀레니얼세대의 눈높이에선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 부족하다. 심지어 스포츠리더들이 소비자들의 응대보다는 각자의 카테고리의 매대 정리를 더 신경 쓰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아디다스 런던 플래그십스토어는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의 사이즈를 매장의 드레스룸에서 디지털 미러나 앱을 통해 요청 시 바로 직원이 요청한 제품을 대령한다. 이에 비해 스포츠리더들에 의존하는 데카트론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듯하다.
소비자들은 더 큰 ABC마트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구매 경험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기대하고 있다.
신박한 제품을 전시하고 스포츠리더가 설명하는 것보다 디스플레이를 통해 해당 제품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준다면 스포츠리더의 부재에도 소비자에게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데카트론 매장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바이럴을 위한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나 대표적인 포토존이 없다. 매장 어느 곳을 가더라도 체험존 외엔 데카트론 매장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장치가 없다.
아디다스 런던 플래그십 매장의 경우, 디지털 터치포인트를 100개 이상 설치하여 소비자와 브랜드의 접점을 최대화하였다. 이처럼 데카트론은 소비자와 교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디지털로 풀어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역특화적인 콘텐츠의 부재이다. 매장 내 가장 큰 디스플레이에서는 글로벌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매장 내 어느 곳에서도 이곳이 전 세계 1,500개 데카트론 매장 중 송도 매장이라고 짐작할만한 콘텐츠가 없었다. 마치 전국에 위치한 150개의 이마트 중 한 곳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다음은 최근 미국 본토에서 그래피티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심찬양 씨가 한 말이다.
"전시장이란 예상된 장소가 아닌 길을 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강렬한 그림에 압도되는 것이 그래피티의 매력이다."
데카트론 매장 또한 우연찮게 방문한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암벽체험장은 디스플레이를 활용하여 정말 산을 오르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고 풋살장에는 정말 유럽의 축구경기장처럼 디스플레이로 관중석을 연출한다면 한층 더 방문객들을 압도하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사람이나 사건을 판단할 때 첫인상이나 최초 정보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매장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에게는 매장이 전달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이미지가 무척 중요하다. 이를 통해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파악하기 때문이다. 작곡가가 음악의 도입부에 심혈을 기울여 관중을 몰입시키듯이 방문객들의 스포츠 체험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데카트론 또한 방문객들을 몰입시키는 장치가 더욱 필요하다. 그러면 데카트론의 본래 의미인 10개의 스포츠보다 더 다양한 스포츠를 소비자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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