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 무렵에 K로부터 전화가 왔다. 필자가 근무하는 회사 근처에 출장을 와서, 볼 일을 마치고 연락을 하는 거란다. 어떡하지. 나는 저녁에 선약이 있는데. 오늘이 다름 아닌 팀 회식 날이기 때문이다. 전화를 해도 꼭 이런 날에 하지. 물론 K가 일부로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저녁 식사는 힘들 것 같고, 간단하게 카페에서 차(Tea)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자주 만나던, 회사에서 약간 떨어진 카페로 장소를 정했다. 다행히도 회식 장소와 그렇게 멀지도 않아 안심이다.
“아니, 신입인데 벌써부터 출장을 다녀요?”
“팀장님 그게 아니고요. 그냥 기획파트 선임자를 따라온 거예요. 제가 지금 아는 게 별로 없잖아요.”
“그러면 보직이 기획파트인가 보네. 업무분장이 그렇게 결정이 난 모양이지요.”
“아니요, 아직. 당분간은 OJT를 받는 걸로”
“아~ 그러면 오늘 출장도 OJT 과정 중에 하나로”
“네. 그런데 팀장님. 지난주 내내 저희 사무실 분위기가 아주 엉망이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개발팀 연구원 한 명이 업체에 연락해서 자재를 가져다 쓴 거예요. 문제는 구매팀에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거예요. 선배들이 자꾸 이 연구원을 얘기하면서 백 도어 셀링(Back door Selling)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그게 무슨 의미예요?”
백 도어 셀링(Back door Selling). 현업에서 흔하게 발생하고 쉽게 개선되지 않는, 구매와 관련된 비정상적 업무 방식이다. 이른바 '뒷문에서 물건 팔기(Back door Selling)'다. 업체가 정문인 구매팀을 통하지 않고 뒷문으로 몰래 구매권한이 없는 요청자에게 곧장 자재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개발 자재의 경우에 많이 발생하는데, 연구원이 업체와 단가 그리고 납기를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가끔씩 양산 자재의 조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때는 요청자가 납기를 자기 입맛대로 통보해 버린다. 물론 구매팀 모르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월권이다. 구매권은 소싱 담당자에게만 부여된 권한이고, 납기권(수급권)은 조달담당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모두 구매팀 소속의 담당자(들)이다. 기업이 아무런 의미 없이 구매 조직을 둔 것은 아니다. 구입과 조달업무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위해 별도의 전문 조직으로 구매팀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원칙과 기준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다른 부서 인원(들)이 알고도 하는 경우와 모르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둘 다 심각한 문제다. 나는 한참을 백 도어 셀링(Back door Selling)과 구매권한에 대해서, K에게 열변을 토했다. 또한 이러한 비정상적인 구매행위를 정상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일, 이른바 뒤치다꺼리도 기획파트에서 처리한다. 즉 구매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그 현상을 파악하고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업무, 그것이 기획파트의 업무다.
“이제 알겠지요. 백 도어 셀링(Back door Selling)이 무엇이고, 구매팀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니까 결론은 '권한이 없는 타 부서의 담당자들이 임의로 업체에 구두로 물량을 약속하고, 실제로 물건을 구매팀 몰래 가져다 사용한다. 그리고 나 몰라라 해 버리면 구매팀에서 뒤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이네요.”
“맞아요. 제대로 이해했어요. 그런데 사무실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네. 기획파트는 제 위로 대리 한 명과 그 위에 과장님이 한 분 계세요.”
“그런데요.”
“지난주 금요일인가? 대리님이 전혀 생소한 업체로부터 전화를 받은 거예요.”
“무슨 전화를”
“업체 사장인가 본 데 '자재를 납품했는데 아직까지 물품대금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계속 물어본 모양이에요.”
“그래서요.”
“그래서 대리님이 소싱 파트에 업체 상호를 알려 주면서, 구매가 나간 게 있는 지를 확인해 봤는데 전혀 없었던 거예요.”
다음은 K가 지난주에 발생한 사무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해 준, 기획파트 과장과 대리 사이의 대화 내용이다.
“김대리, 오전에 업체 건은 어떻게 확인됐냐?”
“네. 과장님. 업체하고 통화해서 애기를 좀 들어봤는데 많이 꼬인 것 같아요.”
“그래, 업체는 뭐래? 아니 요점이 뭐냐?”
“업체 말로는 시험용 치구를 총 3번에 걸쳐서 5개를 납품했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 발주는 누구한테 받고 또 납품은 어디에 했다는데”
“자세히 애기는 안 하는데, 아무래도 개발팀 연구원한테 구두로 요청을 받은 모양이에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난주에 개발팀 애들 교육시켰잖아. 구매 프로세스, 제발 신경 좀 써 달라고. 그런데 걔들 맘대로 발주를 주었다고. 실물 들어온 것을 본 사람이 누구 있어?”
“그게 복잡한데요, 우리 쪽으로 입고되지 않고 시험 용역업체로 바로 간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내일 업체를 직접 찾아가서 사장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오늘 당장 쫓아가야지.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어?”
“저도 그러고 싶은데, 업체 사장이 오늘 시간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그래, 내일 출근하자마자 다녀와. K도 데리고 가.”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K는 담당자인 김대리와 함께, 오늘 내내 업체 사장을 면담했다고 한다. 아니 면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단다. 업체가 누구한테 연락을 받았는지, 어떤 물품을 어디에 납품했는지 또 수량은 몇 개인지, 시점은 언제인지 등을 구매팀 기획파트가 확인한 것이다. 이는 물품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한다. 구매팀 입장에서는 보지도 못한 물품의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난감한 입장이다. 이럴 경우, 구매팀은 대금지급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원칙은 구매팀에서 확인되지 않은 물품의 대금 지불이란 불가하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적 상황이다. 따라서 구매팀은 실제로 일어나 사실(Fact)을 세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회사의 누군가가 물품을 받은 것이 확인되면, 물품대금을 업체에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개선할 부분이 있다면 또 고쳐나가야 한다. 계속해서 K가 전해 준 김대리와 업체 사장과의 면담 내용이다.
“사장님, 저희 회사와 거래가 전혀 처음은 아니시지요?”
“J사를 끼고 작년인가, 한 번 납품은 했었어요. 직접 거래는 아마 이번이 처음일걸요.”
“그래서 말씀인데, 혹시 구매팀 하고 통화하신 적은 없으세요.”
“구매는 모르겠고, 현장에서 하도 급하다고 난리를 쳐서 일단 물건만 가져다주었지.”
“현장은 어디를 이야기하시는 건지..”
“거.. 뭐더라, 개발 뭐라고 하던데.”
“아마 개발팀일 거예요. 그러면 물건도 그쪽으로 직접 가져다주셨나요?”
“아니, 물건은 시험하는 장소가 따로 있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갖다 주었어요. 그런데 뭐가 잘못됐나요? 나는 납품대금이나 빨리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까지..”
“사장님, 대금 처리는 이번 달 내로 처리될 거고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앞으로는 구매팀에서 연락을 받지 않으시면 절대 납품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래요. 전화로 죽겠다고 하는데. 어디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매몰차게 되나. 그리고 개발이든 구매든 다 같은 회사 사람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데.”
“사장님 말씀도 맞는데, 회사 절차라는 게 있잖아요. 구매팀을 통해야 대금이 제때 지불이 돼요. 이번 건도 그래서 처리가 늦은 거고요.”
“그러면 구매팀 사람이 아니면 아예 전화를 못하게 해야지. 우리 같이 중소업체는 헷갈려. 거절할 힘도 없고.”
“사장님 말씀대로 매번 교육을 시키는데도 잘 안 되네요. 우선 회사를 대표해서 사과 말씀드리고요. 앞으로는 꼭 구매팀을 통해서 모든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부탁드려요.”
"그래요. 나도 앞으로는 신경을 좀 써야 되겠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면담이 끝날 때쯤, K는 옆에서 열심히 회의록을 작성했다고 한다. 함께 왔던 김대리는 보고서 작성을 위해 사무실로 복귀했단다. 아무리 OJT 기간이지만, 선임자만 보낸 K의 대담함(?)에 약간은 놀랐다. 본인도 같이 복귀를 하려고 했지만, 김대리가 어차피 짐만 되니까 바로 퇴근하라고 했다는 것이 K의 변명이다.
그나저나 김대리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결론은 무엇일까? 아마도 업체 주장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업체에 대금을 지급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다음 이런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그 누군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회사 규정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는 동일 또는 유사한 사례의 재발방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