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동안 K로부터 별다른 연락을 받지 못했다. 자기 업무로 엄청 바쁜 게 틀림없다. 주변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약 8개월 정도 원부자재 구매담당자로 일하다 MRO 구매로 업무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더 힘들고 정신이 없을 것이다. MRO 구매, 그 업무는 완전히 시간과의 싸움이다. 물론 구매업무 자체가 본래 그런 속성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MRO 구매는 특히 그게 더 심하다.
일반적으로 제조업 현장에서는 수리와 수선 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회사가 물량을 수주하고 생산라인을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생산설비의 갑작스러운 고장, 장비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장애가 수시로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아예 공무팀(회사마다 명칭이 다르다. 여기서는 ‘공무팀’으로 한다)이라는 전담 조직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회사의 제조라인이 다양하고 생산물량이 많을수록, 게다가 경영진이 설비 투자에 인색할수록 공무팀의 업무는 늘어난다. 속된 말로 여기저기 ‘땜질’을 해야 할 곳이 수시로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물론 예산을 제대로 투자해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시기를 놓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리거나 회사의 경영실적 악화로 당장 큰돈을 쓰기가 부담이 되면 일단 고쳐서 사용한다. 따라서 공무팀이 바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는 생산팀! 설비가 갑자기 이상한데 공무팀 출동해 주세요? 오버!’ ‘알겠다. 생산팀! 지금 당장 달려가겠다. 어? 그런데 자재가 없다. 잠깐 기다려라. 구매팀에 확인해 보고 연락하겠다. 오버!’ 구매와 공무 관계는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즉 공무팀의 수리와 수선을 위해 소모되는 수선용 자재도 당연히 구매에서 공급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구매담당자가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공무팀의 구매요청서가 잔뜩 쌓이게 된다. 필자도 신입사원 시절에 엄청 헤맸던 기억이 있다. 도저히 업무시간에 감당을 할 수가 없어, 구매서류를 집에까지 싸들고 가서 일을 했던 흑역사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류의 대부분이 공무팀의 구매요청서였다. 아무튼 공무팀이 바빠지면, 그만큼 MRO 구매담당자도 덩달아 호흡이 가빠진다.
“아니, 김대리! 지난주에 구매 요청한 자재가 왜 아직까지도 안 들어와?”
“박계장 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하려던 참인데요. 좀 확인할 게 있어서요.”
“아니 그게, 계속 사 오던 상용 공구류인데 검토할 게 뭐가 있어? 김대리 전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예, 저도 최대리한테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애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왜 그래?”
“요즘 하도 구매가 절감이 이슈로 가격이 저렴한 업체를 찾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아니? 그게 몇 푼이나 아낀다고 그래. 아무튼 절감도 절감이지만 아침마다 생산 애들 독촉 전화 엄청 와. 수리 의뢰를 낸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대로 야고. 빨리 좀 넣어 줘. 이게 벌써 몇 번째 전화 통화냐.”
“계장님, 정 그러시면 자재가 늦어서 못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한테 전화를 돌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알아듣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김대리!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네.”
“제가 뭘?”
“어제 팀장 주간 회의 분위기 이야기 못 들었어? 사장님이 최근 생산이 일정보다 늦어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생산팀장은 설비라인 수리가 안 돼서라고 공무 탓, 공무팀장은 수선 자재가 입고되지 않아서 구매 탓, 그래서 구매팀장만 엄청 깨졌다는 거 아니야. 회의 분위기 장난이 아니었데, 구매팀장이 이야기 안 해?”
회사의 생산과 관련된 수리나 수선은 수시로 일어난다. 따라서 거기에 필요한 자재 요청도 빈도수가 매우 높다. 따라서 MRO 구매담당자 업무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구매업무에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모두가 그렇듯이 공무담당자도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순서대로 구매요청을 하지 않는다. 어제 구매 요청한 자재가 입고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 새로운 구매요청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수리나 수선 의뢰가 접수되는 대로 공무담당자의 구매요청서는 구매담당자에게 매일 쏟아져 나온다. 공무팀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다. 물론 구매팀도 속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구매는 여기에 원가절감 즉 구매가 절감이라는 미션이 하나 더 붙는다. 금액이 크고 작음을 떠나서 최대한 싸게 사야 한다. 그것이 구매의 가장 큰 존재 이유 중의 하나다. 그래도 원가절감을 이유로 속도가 지연되면 도로 아미타불이다.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다.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구매가 절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진정한 원가절감도 아니다. 그래서 구매가 어렵다.
공무팀 담당자와 MRO 구매담당자와는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은 통화를 하게 된다. 좋든 싫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업무 상 그렇게 된다. 게다가 퇴근 후에도 또는 휴가 기간 중에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때는 그놈의 휴대폰이 원수다. 쉽게 말해 시도 때도 없다. 공무팀 입장에서는 수리를 하든지 수선을 하든지 간에 항상 자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설비 유지와 보수 및 운영에 필요한 MRO 자재는 원자재와 달리 자재 소요계획(MRP)도 미리 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설비 유지관리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여 대략적으로 소요 자재를 예상하는 회사도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예측에 불과하다. 그래서 구매담당자자 전화통엔 항상 불이 난다. 공무담당자 역시 전화를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회사가 정해 놓은 기준과 절차가 법이라서 그렇지. 그래도 전화라도 하는 경우는 양반이다. 그냥 먼저 자재를 갖다 써버리고 나중에 ‘날 잡아 잡 수’하는 공무담당자도 적지 않다. 이런 범죄자(?)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회사 일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라는. 아니 그러면 회사에서 회사 일을 안 하고, 개인적인 일을 하는 직원도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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