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는 각 부서마다 담당자가 있고 그 위에 관리자가 있다. 팀원과 팀장의 관계가 대표적이다(회사마다 직급 체계는 다를 수 있다). 직무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담당자가 회사를 대표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인사나 재무 또는 기획부서 담당자가 회사를 대표해서 업무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팀장(또는 그 이상)이 우선이고 담당자는 극히 예외적이다. 하지만 영업이나 구매담당자는 업무 수행 시, 회사를 대표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중 영업 담당자는 업무 특성상,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구매담당자는 나름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다. 회사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구매담당자가 상대하는 공급업체 담당자의 직급은 오너(Owner)나 임원 등으로 대체로 높은 편이다. 왜냐하면 공급계약 협상 시, 책임 있는 의사결정이 바로바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담당자가 평사원이 아닌 대리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K가 승진을 한 것이다.
“K 대리, 다음 주 협력사 미팅은 어떻게 날짜는 잡았냐?”
“예, 다음 주 월요일에 과장님하고 제가 가는 걸로, 협력사 최상무하고 애기 끝냈습니다.”
“그래. 네가 승진하고 나서 처음 가는 거잖아?”
“그쪽에서도 과장님이 하시던 일을 제가 하게 된 다는 것을 알고, 얼굴 한 번 보자고 계속 연락이 왔어요.”
“잘 됐네.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오면 되겠네. 그래도 작년 거래 실적하고, 최근 이슈사항이 있는지 다시 확인해 봐.”
“지금 열심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협력사 정기 간담회 때 명함이 부족해서 좀 당황했잖아. 그때처럼 명함 빠트리지 말고, 좀 넉넉히 가져가라. 네가 승진한 것도 널리 알릴 필요도 있고.”
“예,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내가 꼰대같이 한 마디 하겠는데. 너무 거부감 있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차피 너도 관리자로서 계속 커야 되잖아. K 대리, 네가 업체하고 미팅할 때 보면 스킬이 좀 부족해 보여.”
“저도 인정하는 걸요, 과장님. 아무래도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쉽게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이번 미팅에서 과장님 하시는 것 보고 많이 배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구매담당자는 공급업체와 방문이나 회의가 상당히 많다. 따라서 나름의 회의 매너나 스킬이 담당자에게 요구된다. 회의에 무작정 덤비는 것이, 신입 시절에는 패기로 이해될 수 있지만 직급이 올라갈수록 그렇지 않다. 대리 정도가 되면, 회의 전문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매너는 알아두는 게 바람직하다. 구매담당자로서 회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갑질을 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저자세도 바람직하지 않다. 상호 간에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다음은 필자가 K 대리에게 알려 준, 업무 미팅과 관련된 몇 가지 팁이다.
첫째 외부 공급업체와 미팅이 필요한 경우,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항은 그쪽의 담당자다. 그동안 유선으로만 업무를 진행해 왔다면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 담당자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규업체라면 더욱 그렇다.
둘째 회의 안건도 미리 공유하는 것이 좋다. 안건을 미리 알려주고 가능 여부를 확약받아야 한다.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참석인원에 대한 범위도 결정지어야 한다. 특히 회의 장소가 협력사일 경우, 협력사의 생산시설 견학을 원한다면 사전에 가능 유무를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업체에 따라서는 생산시설 개방을 꺼리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 즉 회의 장소가 구매업체인 우리 회사로 정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셋째 회의 당일, 약속 장소에 도착하면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하게 된다. 이때는 상대방의 눈을 응시하고, 악수는 짧고 힘 있게 하는 것이 임팩트(Impact)가 있다. 그리고 명함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빠트리면 준비성이 없는 인상을 주기 쉽다. 회의 참석 인원이 다수일 경우, 마주 앉은 상대편의 순서대로 명함을 펴 놓고 이름과 직함을 참고하면 유용하다. 회의가 끝난 뒤에 명함 한쪽에 미팅 날짜와 장소, 주요 내용을 간단히 메모해 두면 나중에 의외로 도움이 된다.
넷째 사안에 따라서는 품질이나 개발부서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할 수도 있다. 품질문제나 개발규격이 회의 이슈가 되는 경우다. 이때는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부서 간의 이슈를 미리 조율하는 것이 좋다. 회의 도중 상대방 앞에서 이견을 논하는 것은, 구매업체의 준비 부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회의 중간에, 부서 간 협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이때도 양해를 구한 후에, 별도의 공간에서 가급적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 회의 내용에 따라, 더 이상의 토의가 불가능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도 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론이 벌어지는 경우가 그렇다. 설령 그런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담당자는 감정표출을 가급적 억제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른바 포커페이스(Poker face)를 유지해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이때는 상대방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음을 표시하고,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갖는 게 최상이다.
여섯째 회의록 작성도 중요하다. 회의를 주관하는 쪽에서 기록하는 게 관례다. 이는 두고두고 이슈사항의 근거자료가 된다. 따라서 초안이 작성되면 문구나 내용을, 정확히 검토해 나중에 불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안이 완성되면 참석자 전원의 서명을 받아 두어야 한다. 우리 회사가 주관하는 경우, 구매담당자가 작성하고 서명을 받아 보관한다. 담당자가 회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핵심을 놓쳐 회의록 작성이 어려울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구매담당자는 회사를 대표하고, CEO를 대신해서 구매업무를 수행한다. 이걸 항상 명심해야 한다. 실제 수많은 공급업체와 구매행위는 담당자가 수행하지만, 발주서나 계약서 등의 구매 문서는 회사와 CEO 명의로 발행되는 것도 그 이유다.
나는 K 대리에게 구매담당자의 권한에 대해서도 함께 설명해 주었다. 구매담당자는 업체 선정권과 가격 결정권 그리고 납기 조정권을 가지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생각보다 상당히 강력한 권한이다. 물론 회사마다 금액에 따라 전결권자의 결재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구매담당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구매담당자가 초안 작성과 초기 방향을 정한다는 측면에서, 실질적인 권한 행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구매담당자의 역량강화가 우선이다. 이게 전제되지 않으면 이 모든 권한이 담당자에게 부담으로 돌아온다. 당장 역량이 없는 구매담당자는 결재권자의 지시대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능력 없는 담당자를 신뢰하는 결재권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 담당자가 대리 정도의 직급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세 가지 구매권한에 대한 좀 더 알아보자.
먼저 업체 선정권을 보자. 제조업의 경우, 대부분의 기업이 협력사 즉 공급업체 풀(Pool)을 운영한다. 여기에는 업종별로 다수의 업체가 등록되어 거래의 파트너로 활동한다. 구매와 협력사 간의 접촉의 출발점은, 구매담당자의 견적서 제출 요청이다. 이때 견적서 요청 업체를 선정하는 것은, 순전히 구매담당자 고유권한이다. 어차피 견적서 제출업체 중에서 발주업체가 결정된다. 견적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발주서를 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임을 봐야 뽕을 따는 법, 임도 보지 않고 뽕을 딸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구매담당자가 발주업체 후보군(群)을 지정하는 것이다. 후보에 뽑히지 않고서 주전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신규업체 선정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업체 추천이나 회사 소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구매담당자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도, 구매담당자의 평가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만이다. 우선 기존 협력사 풀(Pool)에서 해결이 가능하다면, 굳이 추천업체를 신규 등록할 필요가 없다. 이런 판단의 주체가 구매담당자다. 또한 요구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류심사나 현장방문을 통해 자격요건 미달이 판단되면 당연히 탈락이다. 누가 결정하는가? 역시 구매담당자다. 이런 관문을 통과해야 관련 서류가 결재권자의 책상 위에 올라갈 수 있다. 등록 승인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물론 회사 정책이나 경영진의 별도 지시에 의한 경우는, 구매담당자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경우는 담당자 권한 밖의 일이다.
두 번째 가격 결정권이다. 구매담당자는 견적서 접수 후에, 상대인 협력사와 가격을 조율할 수 있다. 이른바 네고(Negotiation)를 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연말에 진행되는 내년도 단가계약 협상이다. 협력사는 단가 인상을 목표로 하고, 구매팀은 단가인하 또는 최소한 현상 유지를 타깃(Target)으로 한다. 서로의 입장을 사수하기 위하여 과년도 구매실적, 향후 공급물량, 단가 변동 추이 등을 분석하고 검증한다. 한쪽은 인상(Up)을, 다른 한쪽은 인하(Down)를 목표로 마주 보고 달린다. 회사마다 특성이 달라 구체적인 접근방식은 다르겠지만, 역방향의 기본 원리는 똑같다. 이때도 단가 협상의 실무자는 구매담당자다. 비록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치는 경영진이 제시하겠지만, 실무자의 능력에 따라 가격 결정은 차이가 날수 밖에 없다.
가격협상을 좀 더 살펴보자. 구매 입장에서, 협력사가 자율적으로 공정 개선을 통해 가격을 내린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공정 개선이란 협업의 산물이다. 단순히 공급자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대체로 품질과 규격 변경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아, 사용자의 의견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공정 개선에 소요되는 기간도 짧지 않다. 반면에 구매담당자가 가격 조정을 위해 공급업체에 제시할 수 있는 옵션도 있다. 발주물량의 확보, 물품대 지급조건 개선, 마감일자의 단축 등이다. 단가 인상에 준하는 효과를 공급업체에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서로 합의가 된다면 단가를 동결하거나 인하할 수도 있다. 이 또한 구매담당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논의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
마지막으로 납기 조정권이다. 협력사 즉 공급업체의 요청에 의해 납기를 앞당기거나 뒤로 미루는 것도 구매담당자(물론 자재팀이 별도로 있는 회사는 자재 담당자의 권한이다) 권한에 속한다. 협력사의 요청에 따라, 납기를 앞으로 조정하면 회사의 재고부담이 발생한다. 구매담당자의 면밀한 분석과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따라서 구매담당자 사전검토가, 실질적인 결론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납기를 뒤로 미루는 경우도 보자. 이때는 협력사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협력사를 누가 상대하는가? 구매담당자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협력사를 설득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구매담당자에게 있어서, 역량은 권한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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