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관예우 협력사에 대한 답변을 K에게 보내자마자, 그다음 날 바로 메일이 날라 왔다. 구매팀이 특정 협력사의 공급 이슈에서 독박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애기다. 메일 곳곳에 K가 협력사 관리에 몹시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런데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것은 따로 없다.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수준에서 답변을 보내는 수밖에.
협력사 즉 공급업체 중에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업체가 꼭 하나씩은 있다. 그런 업체와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구매담당자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행여 구매 이슈가 발생하게 되어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급업체가 구매업체 생산일정에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제조업체가 공급업체 눈치를 봐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경쟁사마저도 그곳과 거래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물론 공급업체 이원화 또는 대체업체 발굴을 검토할 수 있다. 문제는 발주물량이 그 정도 덩치(Volume)가 안 되는 경우다. 두 개 업체 또는 신규 투자를 할 만큼 파이(Pie)가 크지도 않다. 또한 신규업체가 단기간에 기존 업체의 품질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관건이다. 그래서 회사 입장에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기존 거래 업체를 유지했을 때와 과감한 용단을 내렸을 때, 양자 간의 리스크(Risk)를 서로 비교해 본다. 그 결과 대부분의 기업들은 전자를 선택한다. 기존 공급업체와의 거래가 위험이 작다고 판단한 것이다. 동시에 이런 결정으로 예상되는 작은 위험(Risk)은 회사가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작은 위험(?)은 온전히 구매의 몫으로 돌아온다.
“상무님, 공급일정 보내달라고 몇 번을 전화드렸는데 답을 안 주세요.”
“그렇다고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어떡해.”
“아니, 사전에 연락드리면 만날 수가 있어야 지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리고 내가 요즘 워낙 바빠서 그래. 지금도 바로 나가 봐야 돼. 외부 약속이 잡혀있어서 말이야.”
“공급 스케줄 주고 가세요. 상무님 때문에 우리 회사 생산일정을 확정할 수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박 대리 회사 생산계획이, 왜 내 탓이냐?”
“상무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자재 공급계획이 나와야 생산 일정이 나온다는 거.”
“그래서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우리 회사 공급계획은 따로 없다. 그냥 생산일정을 보내다오. 그러면 라인 멈추지 않게 내가 넣어 주겠다고.”
“상무님! 저희가 무슨 동네 골목의 구멍가게입니까? 그런 공급방식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여기 있잖아. 박 대리도 잘 알면서 왜 그래? 박 대리 회사 물량만으로 공급일정을 짤 수가 없다니까.”
“그래요. R사 때문이지요? 거기 이번에 해외수주 큰 거 하나 터졌다고 하던데.”
“잘 아네. 서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지금 R사가 우선이냐. 그쪽 수출물량이 이번에 만만치가 않아요. 그건 박 대리가 이해를 좀 해 줘.”
“아니 그놈의 수출물량이 천년만년 나올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 회사 내수 물량은 뭐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내가 얘기하잖아. 박 대리가 원하는 대로 넣어 주겠다고. 내가 뭐, R사 물량만 100% 챙겨 주겠다는 게 아니라고. 생산라인 멈추지 않게 공급해 줄 테니까 생산계획 주고 가. 그리고 R사 수출물량 없을 때, 내가 또 얼마나 협조를 잘했어. 알았지. 박 대리! 나 지금 나가 봐야 돼.”
D사는 알루미늄 내장 케이스를 만드는 협력사다. 설비나 장비도 필요하지만, 작업 숙련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제작품이다. 작업자의 제작 경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애기다. 또 하나 특이한 사실은 대부분의 동종업계가 D사로부터 자재를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회사와 R사가 D사의 주요 고객으로, 이 바닥에서는 흔히 빅(Big) 투(Two)로 불린다. 두 회사가 D사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내수시장에 역점을 두고 있고, 해외시장은 R사가 대부분의 물량을 선점하고 있다. 그래서 시장에서 R사를 마주치는 일은 다행히도 없다. 그런데 이놈의 내장용 포장재가 공급 물량 확보가 항상 문제다.
구매업무를 하다 보면 협력사 공급에 문제가 있고, 대체업체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업체를 이원화하기에도 예매한 경우가 있다. 결국 구매담당자 입장에서 기존 공급업체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회사도 이러한 사실을 안다. 그렇다고 회사가 구매팀의 입장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당장 자재가 공급되지 않으면 모든 화살은 구매로 돌아오는 게 현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구매는 생산이 돌아갈 수 있도록 자재를 공급해야 되기 때문이다. 행여나 회사 경영진이 저간의 사정을 기억하고, 공급 불안정에 대한 구매의 책임을 면제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회사에서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을 더 묻지 않으면 다행이다. 물론 구매 역시도 딱히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이때는 공급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하다. 생산이 가능한 수량이 아니라도 좋다. 조금씩이라도 공급량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구매가 할 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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