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입사로 시작된 직장생활의 마침표가 찍혔다.
등 떠밀린 안녕은 아니다. 희망퇴직을 내손으로 써 내려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보냈다. 꽉 채운 9년에 가까운 직장생활을 끝낸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며칠밤을 새워 빼곡히 채워 辭職書(사직서)라고 적힌 봉투에 담은 긴 글이 아니라 사내 메일 한통. 회사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퇴사,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내고 말았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야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장의 기로에 놓여있었던 어중간한 나의 위치 때문이다. 열정적으로 일을 배우며 잘해보겠다며 들어선 직업이 생업이 되고 어느새 나는 받은 돈만큼의 일을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정된 직장보다 아무 보장 없는 모든 것이 설렘인 쫄깃쫄깃한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나의 퇴사는 희망퇴직이다.
'역시 대기업이라 달라'라는 웃음 뒤엔 대기업이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어 씁쓸하기만 하다. 떠난 자와 남은 자가 되어 어제의 친구와 어색한 웃음으로 보낸 마지막 한주는 마냥 행복할 수 없었다. 중간관리자라 불리는 애매한 위치, 언젠가는 겪어야 할 경력단절녀로서의 미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도 죽어라 노력하면 될지도 모르는 높으신 분들에 대한 생각들, 회사와 나 그 중간에 높여있는 수많은 암초들을 애써 외면하던 나에게 희망퇴직은 선물이었다. 나는 정해진 시간의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메일을 보냈다. 어려운 결정. 입사보다 더 어려웠다. 결정의 끝에 나는 평안해졌고 다른 선택을 한 이들 중 누군가는 대놓고 편치 않은 눈빛을 보냈다. 모두에게 주어진 똑같은 선택권이지만 다른 결과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같은 꿈을 꾸었다 믿었던 사람일수록 실망과 부러움이 뒤섞인다. 결정을 하고 나니 회사에 대한 생각도 나 자신에 대한 생각도 분명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던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살던 세상은 부서지기 일보직전인데 하루하루 땜질하며 살았던 것이다. 퇴사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보지도 알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더 삶을 위해 좋았을지를 다시 고민하는 것은 의미 없다. 그저 선택의 시간의 지나갔고 나는 이 자리에 앉아서 내 지난날을 추억한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찾아서 알아갈수록 더 많은 것들이 선명해짐을 느낀다.
불현듯 막막하던 안타까움에 얼굴이 빨개졌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나는 보충수업 거부를 하던 공부 잘하던 학생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나에겐 지기 싫은 욕심과 잘 돌아가던 머리가 있어 노력하던 친구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받았다. 아마도 나의 거부는 친구들에겐 잘하는 아이의 뭔가 알 수 없는 잘난 척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의식하기 전엔 몰랐다. 그 친구들의 속상함을. 그러다 가정 선생이 나를 불러내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해준 이야기가 어렴풋이나마 그 마음들을 알게 해주었다.
"너 같은 애들이 지 잘난 줄 알고 세상이 다 너를 위해 있을 거라 믿는 거 아는데, 나중에 너 세상 살아가다 보면 내가 얘기하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너 그렇게 살지 마."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정당한 선택도 그렇게 못하는 친구들에겐 열등감,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마음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계기로 보충 수업 거부를 멈추었다. 한참 지난 후 대학생이 되어서 나 역시도 큰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맞는 일을 했는데도 모두가 상처뿐이였던 기억,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한참 고민했다. 삼 년이 지난 일들을 곱씹으며 어떻게 행동했어야 되었던 것일까 정답을 찾아 헤맸다. 어쩌면 지금 나의 선택은 남은 자들에게 비슷한 속상함을 안겨준게 아닐까. 모두가 최선을 다한 선택이지만 누군가는 미안하고 누군가는 불안하다.
웃으며 떠난다고 느끼고 있는 남은 이와 불안하게 떠나면서도 마음만은 가벼운 떠나는 이들.
희망퇴직이기에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나는 회사가 꼬꾸라질 때까지 모두와 함께 달려야 했던 것일까?
회사에 남은 이들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어쩌다 단단하던 회사가 저렇게 까지 되었지?
수많은 물음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모든 것을 털어버렸는데 자꾸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출구를 찾아 문을 열고 나왔다.새로운 세상이다. 하지만 과거를 정리하고 이야기 하지 않고 앞을 향해서만 간다면 언젠가 다시 정답을 찾아 헤맬 것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과거의 나를 반추하는 것, 백수생활의 출발점이다.

ps. 지나간 것들은 다 아름다워 보인다 했던가.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은 않겠지만 그 곳에 여전히 남은 이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내일이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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