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직장인의 공통점은 소속되어 있다는 것. 성적과 고과를 위해 열정과 시간을 들인다는 점.
차이점은 학생은 돈을 내고 소속감을 얻는 다면 직장은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적을 높이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밤샘 공부를 하듯이 회사에서는 승진과 평판을 위해 야근을 하고 정치를 한다.
백수가 된 지금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보면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였는지 궁금해진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칭찬받아 좋은 딸이 되고 싶었고 대학생일 때는 업계 스타가 되고 싶었다. 꿈은 변한다. 현실은 냉정하고 실패로 끝난 도전은 매번 나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곤 했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조율하며 이룰 수 있는 것들만을 바라보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허망한 꿈들 대신 조금 낮춰진 목표에 맞춰 하나씩 손에 쥐어가기 시작했다. 하나를 쥐면 다음 목표가 생겨나고 그다음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자리를 사수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울고불고했던 억울한 많은 것들과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던 분노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적당히 버텼으면 되었을만한 것들이다. 어린 신입부터 중간관리자를 지나 실장까지 도돌이표처럼 상황들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달라진 나도 연차가 쌓여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 시간이 흘러 이른바 닳고 닳은 직장인이 되어갈수록 억울함에 우는 횟수는 줄었고 화를 나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화가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다. 회사에서 가장 확실하게 배운 것은 개인의 일탈로 치부되는 어떤 행동들은 아무리 정의롭다하더리고 그 개인을 그저 불만에 찬 병신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면서도 입으로 꺼내지 않는 이야기들에 대해선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분노를 삼켜야 한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상식처럼 보이는 많은 것들은 비효율적인 관례이거나 암묵적인 규율인 경우가 많다. 그 오랜 시간을 그렇게 견고히 쌓아왔는데 회사의 몇백 명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덤비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일어난다 해도 회사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회사의 임원은 후배 직원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한다 말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자신의 안위가 가장 이해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분노가 차오르다가도 아무것도 못한 채로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 선물처럼 좋은 고과를 받고 보너스를 받으면 마음이 누그러진다. 내가 지금 여기를 나서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나를 인정해주는 곳이 이 곳 말고 또 있을까. 도돌이표는 내 마음속에도 있었던 것이다.
입사할 때의 계획은 삼 년만 다니자는 것이었다. 대기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직장문화 속 버티기와 두둑한 통장일 뿐 다음으로 가기 위해 잠깐 스쳐 가기로 한 곳이었다. 그러나 입사와 동시에 동기도 생겼고 선배도 생겼다. 그 안에서 대학교 동문들과 만나고 도움도 더러 받았다. 직장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벗어나면 끝이라고들 많이 말하지만 나에겐 몇몇의 사랑스러운 동반자들이 남았다. 힘든 일이 생기면 위로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술에 취해 울면서 집에 가는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나는 가장 먼저 회사에 가곤 했다. 속상하면 웃었고 억울하면 더 잘하려고 했다.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고비의 시기는 3,6,9이다. 나는 3년쯤 지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직급, 대리를 달았고 6년쯤 지나니 업계 최고의 월급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9년을 꽉 채울 때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처음의 입사 계획보다 훨씬 멀리까지 왔다. 만약 9년의 고비를 넘겼다면 나는 당연하게 삼사 년의 육아휴직을 받고 어떻게든 정년을 채우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내 미래가 보였기에 희망퇴직을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메꾸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소속감
소속감은 많은 것에 동기부여를 한다. 왜 뛰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시간도 없이 뛰고 있는 옆사람과 함께 앞만 보고 달려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대기업의 소속감은 이제 갓 사회에 들어선 이들에게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준다.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수백 명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갖는 안도감과 위안은 마치 거친 바람을 마주하는 숲 속에 있는 나무가 된 것 같다. 큰 바람이 몰아쳐도 모두가 함께 버틸 수 있고, 내가 조금 힘이 없는 나무라도 옆의 커다란 나무가 함께 흔들려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 믿음이 뿌리를 내리며 작은 나무에서 큰 나무로 성장한다. 숲을 선택한 나무 모두가 함께 울창한 숲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울창한 숲으로 이야기가 계속되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동화가 아니기에 어떤 이유인지 (경제위기? 승계? 뭐 이런 것들) 몸집이 불어난 대기업은 인력 효율화를 시작한다. 그 숲에 갑자기 벌목이 시작되는 거다. 벌목은 가차 없이 이뤄지고 잘리는 자와 남은 자 사이의 차이는 도끼든 자만이 알뿐이다. 언뜻 당연히 잘려야지라고 말하는 저성과자의 무능력함이란 줄 서기를 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왜 줄을 세웠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평화롭고 조용한 기업문화에 젖어버린 우리는 알면서도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한다. 힘든 선택을 했다며 잘리는 자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줄을 세운 자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그저 잘라내기만 한다. '내가 잘리지 않는다면 괜찮아' 가 무관심과 이기심이 팽배한 가운데 조금씩 함께 줄을 서던 사람들의 수가 적어지는 것을 우리는 외면한다. 아무리 잘라도 줄이 세워진 이상 끝자락에 서있는 나무는 항상 생겨난다. 그저 저 나무는 순서가 돼서 잘리는 거고 나는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아 살아남은 것이다. 소속감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새로운 나무들이 숲 안으로 들어온다. 점점 현실을 깨닫은 시간은 짧아지고 있다. 내겐 9년의 시간이었는데 후배들은 그 시간조차도 갖지 못한 채 언젠가는 끝에 서야 하는 줄을 서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회사를 나오면서 나는 누군가를 위해 숲이 되기도 전에 줄을 서지도 않고 순서만 당겨버린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아 이제 막 숲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지금도 계속 미안하다. 좋은 선배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힘이 없다는 이유는 변명일 뿐 함께 싸우고 싶지 않았던 나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 미안하다. 앞으로 더 좋아질 지금도 좋은 회사라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얻을 게 많은 대기업에서 운이 좋아 9년이란 시간을 보낸 나에겐 좋은 회사였던 적도 있었는데 후배들에게 그만큼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얻을 만큼만 일하고 너희도 떠나라고 얘기해서 미안하다. 이렇게 위로금 받아 먹튀 해서 미안하다.
존경심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자신이라고 자부하지만 부러운 사람은 나타난다. 부러움이 내가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작은 동경이라면 존경심은 언젠가는 그이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다. 존경받는 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항상 계속되어왔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를 가장 존경합니까?'라는 질문이 가장 흔했다. 회사에서 존경하는 누군가를 찾는다면 애매하게 대답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인간적으로는 좋아합니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거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겐 나보다 20년씩 오래 동안 일하신 분들은 하늘 같은 존재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바로 아래 직급에겐 지옥같이 무서워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임원들이 대부분이라 옛 회사에서 임원 한번 해보는 걸 꿈꾸기도 했다. 가려진 진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직급이 두 번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실과 감춰진 진실을 모두가 알지만 함구하는 회사의 공기는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함을 공유하는 이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오랜 시간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진짜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너무 많은 것을 그들끼리 독식하고 있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다. 아랫사람을 챙긴답시고 아주 사소한 것에 크게 생색내지만 정작 큰 결심은 윗사람만을 위해서 한다. 세상에 알고 보면 나쁜 사람 하나 없다고 하는 말은 누구나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임을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되었다. 연봉 순대로 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할진대 마음속 고민과 고뇌만으로 그 무게를 다 감당하고 정작 일은 아랫사람에게 다 던진다. 그들에겐 회사와 상사의 존재가 자신이다. 회사에 자신의 운명과 가족의 안위를 걸었으며 지금의 불안보다는 이 고비 뒤에 있는 더 큰 권력과 돈을 원하게 된다. 지위에 맞춰 사람이 변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시간은 흐르고 매년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내려온다. 술자리에 만나면 예전 내가 알던 그분이 맞는데 결단력과 의지력을 상실하고 임원이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치열한 경쟁 끝에 살아남은 미래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선택일 뿐.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분들도 그 시대에 더 억울하고 더 분노하며 여기까지 꿋꿋이 올라왔을 텐데 그들 역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며 모든 것을 희생했을 텐데 그 긴 세월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그렇게 나와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다. 열심히 사신 분들이다. 그게 내가 보기에 그 위치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나쁜 사람이라 욕할 수가 없었다. 처음 임원으로 발탁된 날, 탕비실에서 만난 선배님은 우울해하셨다. 앞으로 나는 매년 다시 고용되기 위해 더 열심히 회사를 다녀야겠구나. 일 년 만에 나간 선배 임원분이 떠오른다며 축하한다는 나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난 고작 9년이다. 20년 넘게 한 직장을 지키며 살얼음판을 앞장서서 걷고 있는 그분들이 좀 더 용감해지길, 책임질 줄 알고 직언할 수 있는 존경할 수 있는 선배가 되길 바라는 건 겪어보지 못한 후배들의 투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회사를 나온 건 그분들처럼 나도 변해갈까 봐 같은 길을 걸어도 나는 다를 꺼야라는 확신이 없어서였다. 모두가 알면서도 침묵하는 회사 안에서 얼마나 내가 다른 임원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치열한 경쟁 끝에 살아남는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말이다. 훗날 누군가가 나를 존경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상식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어떻게든 사회 안에서 버티고 싶다.
희망퇴직이 시행된 회사의 비극은 모두 언젠가는 잘린다는 미래를 받아들였다는 거다. 그냥 보기엔 이젠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대기업은 살아남는다. 우리나라의 기업 생태계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대기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직원들은 유순해진다. 어쩌면 자포자기해 버리는 것일지도. 자르면 나가주고 살아남으면 충성을 다하게 되는 거다. 대기업이 인재상에 항상 열정과 혁신을 넣지만 회사의 인재가 된 이상 온순하기를 바란다. 그건 단순히 대기업의 문제만은 아니고 사회의 낡은 인식 때문이다. 매스컴에서 멋지게 포장해서 대중들이 선호하는 업계 스타들이 운영하는 회사치고 노조 있는 곳이 없고 말로는 디자인이라지만 저가 덤핑으로 시장 자체를 흐려버린다. 열정 페이가 문제 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업계 사람들도 많다. 지난 세월과 현재를 비교하며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살면서도 불평만 하는 아직 앳된 후배들이라 간주해버린다. 어디서부터 우리 사회는 잘못된 걸까. 어쩌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온 걸까.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젊은 후배들을 응원한다. 기왕이면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나은 회사에서 일하기를. 언젠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고민이 시작되는 날이 오거들랑 얼마나 넓은 세상이 있는지 잊지 말고 꼭 기억해내기를. 어떤 선택을 하든 얻을 것을 다 얻고 손해 보는 일 없기를. 어떤 회사에서 어떤 직장인이 되든 모든 선택에는 그에 맞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나왔다고 걱정할 일도 없고 남았다고 우울할 일도 없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고 시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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