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내려놓는다는 것은 다시 일어날 것을 전제로 한다. 그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쉼을 선택한 사람에게 시간은 때론 약이기도 독이기도 하다. 쉬는 것조차 걱정으로 가득 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안함과 조바심은 다른 단어이다. 두 가지의 비슷한 듯 다른 형태의 어지러움이 마음을 공격하면 쉬고 있는 사람의 견고한 방어도 흔들리기 쉽다.
쉬지 않고 달리던 그때는 불안하지 않았던가.
끓임 없이 채찍질하던 그 날들에 조바심 내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기업(반어법으로 쓰이기도 실제 그렇기도 한)의 희망 퇴직자들에겐 재취업을 위한 컨설턴트가 붙는다. 한 달에 한번, 총 3번의 만남을 통해 좋은 정보를 받고 계획을 세우는데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이번 주 만남은 두 번째 면담이었다. 첫 만남에서 '딱히 계획한 일 없고, 하고 싶은 일 많고, 어설프게 잘하는 일로 돈 벌 수 없고, 돈 벌던 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등의 총체적인 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설명했던 터라 딱히 기대를 하고 간 건 아니었다. 그 사이 변한 것 없는 강남의 대로들의 낯설고 거대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변한 건 나뿐이었다. 변화는 매우 낮고 천천히 오지만 쌓이는 눈의 속도만큼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그 변화의 크기에 놀라게 된다. 춥디 추운 겨울을 지나오는 동안 강남 직장인에서 강북 백수 아줌마로 변한 나에게 높은 오피스로 꽉 찬 도시 풍경이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 변화의 속도가 나만큼 상담사에게는 없었던 탓이었으리라. 첫 만남과 똑같은 멘트들이 재생된다.
워낙 다른 분들과 다르게 일 년을 쉬시겠다는 계획이 있으시지만 그 후에 대한 대비를 위해 지금 많은 것을 준비해 놓으셔야 합니다. 지금 쯤이면 경제적인 부분도 고려하시면서 현재를 낭비하지 마시고......
아. 순간적으로 훅 휩쓸릴 뻔했다. 현재를 지금 낭비하고 있다니. 하루에 티브이 시청 시간이 회사 다닐 때의 세배 정도 되고 (대부분이 뉴스와 영화다) 체력증진을 위해 하루에 두 시간씩 요가 수련을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갖고 싶은 건 10번 정도 생각하고 참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일어나서 삼십 분은 멍 때리며 김어준의 목소릴 듣는다. 이렇게 느긋하고 게으른 하루가 내 인생의 낭비라니. 잠깐 낭비처럼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가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는다.
인생 길다. 하루 24 시간도 길다. 30년 넘게 살아온 내 삶도 길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학교에 얽매여 일학년 땐 이학년 걱정하고 중간고사 끝나면 기말고사 걱정하며 살아온 세월도 십오 년을 거뜬히 넘긴다.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역설적이게 책임에선 가장 자유로왔던) 그 시절을 보내고 회사 생활 9년에 접어든다. 그리곤 사서 고생과 사서 걱정을 쓸데없는 삽질과 함께 보냈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과 시간으로 지금 일 년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놀아본다는 게 왜 낭비가 될까.
낭비는 쓸데없이 소모해버리는 것이다. 지금 쉬는 시간은 그동안 낭비해온 내 열정과 젊음에 대한 충전이다. 낭비는 꽉 차서 넘쳐나는 무엇인가를 허공에 뿌리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동안 쪼들려온 시간을 보상받는 중이다. 계획된 휴식, 쉼에 관대해지자. 우리 사회의 보통 열심히 사는 삶을 기준은 너무 빡빡하다. 성공이란 결과를 위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는 사람들 중 성공한 이의 가장 힘들었다는 시간이 모든 사람의 인생의 기준이 돼버렸다. 때론 열심히 살지 않아고 부모덕에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으로 평생을 안락한 사람도 있고 물질적 부보다는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인생에 정답은 알아서 찾는 걸로.
물론, 나를 덮어놓고 걱정하시는 부모님껜 온갖 자격증과 나중에 공무원 시험을 볼 거라는 약간의 신빙성 있는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절실하게 노력하면 이루어지라는 마법을 믿고 인생의 황금기를 또다시 즐겁지 않은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쉽게 얻어낸 시간이 아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안정적 업을 버리고 얻어낸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다.
불안함과 조바심은 끝내기로 한다. 불투명한 미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쉽게 다가오지 않는 목표 달성은 즐거운 기다림으로 바꿔보자. 현실적인 최후 보루의 끝에 매달려서 달랑거리는 삶도 기우뚱 기우뚱 줄타기하듯 앞으로 나아간다. 그 앞에 속도를 내고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휩쓸리지 말고 균형을 잡는 지금 이 시간을 꽈악 잡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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