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뜬다. 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다른 곳에서 바라보니 생경하다. 뚜벅뚜벅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그리 길어 보이던 다리는 순식간에 지나쳐 다리 위의 풍경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는지 나름 다잡았던 각오가 무색하다. 건너편에 아직 남은 이들에게 안녕을 고한다. 더 다리를 건널 이들은 누구일까. 왠지 다시 이 다리가 열릴 것 같지 않다. 아마도 건너려면 저기 아래까지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희망퇴직은 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짧고 기억나지 않는 오랜 일이 된 듯한다. 다시 다리가 열리기를 고대하는 이들의 소식이 바람결에 들린다. 함께 다리를 건넌 이들은 지금 각자의 다음 종착지를 향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별다를 게 없는 업계의 소식들이 그렇게 쏟아져 나왔다가 들어간다. 몇십 명 내보낸다고 무너질 리 없는 회사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나은 변화를 기다린다. 그렇게 다리를 건너지 못한 이들이 저편에서 서성인다.
남은 이들의 한숨이 들린다. 또 다른 탈출구를 기다린다. 다음번 희망퇴직까지 준비를 끝내리라 약속하던 이들의 기다림은 언제쯤 끝이 날까. 하나도 달라진 것 없는 옛 회사의 모습은 언제까지 그대로일까. 대기업의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는 절망일까. 희망일까. 월급 밀리지 않는 좋은 회사에 머무르는 능력 있는 이들의 속이 타들어간다. 속이 타들어가지 않는 또 다른 능력자들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까.
수고했다는 노랫가사말이 위로가 되던 날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수고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기억들이 쌓아 올린 대기업의 추억과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직장 세계의 사람과의 관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오늘도 수고하고 있을 이들의 복잡한 마음속을 더 이상 공감할 수 없다. 해가 바뀌고 젊은 친구들과 다른 기회를 잡은 이들이 회사를 떠난다. 한두 명의 이탈이 사람들을 흔든다. 눈치를 볼 수 있는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은 회사가 다시 일어서기를 희망한다. 물론 다시 일어서겠지만 이제 모두가 원하는 회사가 없다. 객관적인 시선을 잃은 자기비판은 연민으로 도배된다. 한 명의 사살자를 내고 싶지 않은 공고한 그들만의 리그(한해 계약직인 임원들)에 희생되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만 아니면 괜찮다 말하는 숨죽인 이들의 답답한 마음은 누가 보상해줄까. 희망퇴직이 휩쓸고 간 후 변화에 실패한 회사에는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난무하다. 모두의 잃어버린 자존감은 생존력으로 변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사람은 마지막 영광을 차지한다. 그 마지막 영광을 향한 직장인이 벌이는 정치는 비겁하다.
넌지시 먼저 건너간 나를 향해 부러움을 던지는 이들은 현재 자신을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만큼 안락함을 버리지 못하는 익숙함이 크다. 두 개의 상충되는 욕심들이 마음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다. 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존력으로 무장한 이들 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변하지 않는 보스의 거짓말에 긍정과 열정을 보태는 임원들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다. 한 개의 담배가 한 갑이 되고 한 잔의 위로가 이, 삼차를 부르며 오늘도 남은 이들은 그렇게 수고하고 있다.
떠난 자는 남은 자의 고뇌가 보인다. 그렇지만 어떤 선택도 좋다고 나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흘러가며 살아갈 수밖에. 다 큰 어른들이 모여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루 종일 고민하고 있는 게 한심해 보인다고 생각하는가?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려 몸부림칠수록 상처만 깊어지는 순간 어쩌면 순응하며 그대로 살아있는 게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다시 희망퇴직이라는 문이 열린다고 해도 남은 이들의 고민은 변하지 않을 테고, 꿈꾸는 과거의 영광은 오늘보다 내일 더 멀어질 것이다. 부러워만 하는 삶을 살아간다 비관하지 말자. 그렇게 살아가며 가족들의 행복을 지키는 가장들이 지탱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사회이다.
그리고 그 회사. 내가 떠난 옛 회사는 이제 없다.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돌리고자 했던 과거의 찬란한 모습도 비정상이었고 내가 떠나던 그때도 비정상이었고 남은 이들이 만들어 갈 미래도 비정상이다. 그러니 다 좋아질 거라는 이 회사가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은 임원들의 테이블에만 올리도록 하자. 부럽다면 너도 변하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변화의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폭도 다르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폭이 작은 무모한 사람이다. 백수도 할 수 있는 배포와 용기가 필요한 법.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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