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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저물어가는 것은 퇴근과 맞물리고 다음날은 출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하루 24시간 중 잠을 자는 밤 시간을 배고 모든 시간은 정해진 회사 시간표를 따라간다. 

그렇게 나의 시간표는 회사 동료들과 공유된다. 그 공유가 끝났다. 

 

대학교 수업시간표는 9시였다. 알바를 위해서 혹은 아침 일찍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가 아닌 다음에야 새벽 5시 반에 눈을 뜨는 일은 나의 20대에 오지 않을 거라 믿었다. 집은 회사와 멀었고 이사를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와 가까워져서 집 바로 옆 회사가 돼버리면 정말 직장인 말고는 다른 인생을 꿈꾸지 못할 것만 같았다. 대학교는 가까워야 했지만 회사와는 적정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나의 아침은 새벽 5시 반부터 시작되었다. 

 

까만 밤하늘보다 파랗게 물든 새벽하늘을 보며 지하철 역으로 걸었던 내 첫 출근의 기억이 아득하다. 어디선가 지난밤의 영엽을 끝내고 정돈하는 가게의 소음이 들려오고 저 멀리 아파트의 까만 그림자 속에 한두 개씩 불빛이 들어왔다. 혼자서 걷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거리는 북적였던 지난밤과 사뭇 다르다. 묘하게 외로운 가로수들도 편안해 보였다. 입김이 이내 사라져 버리는 그 날의 차가운 온도가 엊그제 같이 생생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첫 출근했던 기억 때문일까. 나에게 1월은 시작이다. 그리고 또 다른 1월이 다가오는데 이제 나는 출근할 곳이 없다.

 

오늘로 새벽하늘을 보지 못한 지 이주일이 돼간다. 습관은 일상 안에서 무섭게도 쉽게 사라진다. 모든 것에 꼬삐가 풀린 자유 앞에서 나는 지켜야 하는 시간표가 없어진 것이다.  시간표가 없어지니 하루 일과표가 매일매일 달라진다. 뭔가 시간표를 만들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노력해서 들어간 회사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다시 시간표에 미래를 위한 시간표를 짜서 똑같은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회사를 그만두고 만난 지인들과의 대화는 무작정 좋아 보인다는 부러움과 실제론 불안하지 않아라는 걱정이 섞인다. 애써 회사를 다닐 때의 안정감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안정감을 누리고 있는 지인들에게 나는 못 먹는 감을 먹어버린 사람이다. 그 감이 너무 달콤해서 맛있다고 해도 혹은 떫는다고 해도 어색하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반복하다 보면 그러다 망하면 어쩌려고 하는 걱정이 지인의 얼굴에 스치곤 한다. 나는 현실에 살고 있는데 가끔 사람들은 내가 현실을 잊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때론 쉬어갈 때도 멈춰 서서 서있는 자리를 돌아볼 때가 있는데 그러려면 그 시간 동안 자신과 주위의 불안함을 견뎌야 한다. 어설프게 불안함을 감춰야 할 정도라면 퇴직을 선택해선 안된다. 그래서 밀려나듯 찍혀서 나가는 사람들은 괴롭다. 견딜 마음가짐을 갖출 준비도 없이 그저 떠밀리면 그 배반의 느낌과 동시에 허무함에 허우적 되게 된다. 희망퇴직이 지나간 회사의 다음 수순은 대부분이 정리해고이다. 남은 이들을 생각하면 그 예상대로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대기업의 속성이 어디 그렇던가. 

 

일상 속의 나는 이리 쉽게도 변했지만 아직도 나를 회사 속의 일인으로 생각하며 나름의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직장인의 습관이 단순한 시간표만은 아닌 듯하다. 매달 들어오는 마약 같은 월급을 어느새 기다리고 있다거나 누구보다 저렴하고 즐거운 휴가를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비행기 티켓을 주시한다.  아무 의미 없이 필요하지도 않은 쇼핑몰을 뒤적이며 장바구니를 채우고 이력서에 밑줄 하나라도 채우려면 자기계발을 해야 하진 않을지 고민한다.  뼛속까지는 아니라도 근육 정도는 직장인화된 듯하다. 어디까지 물을 빼야 하는 걸까. 하루 시간표를 짜려고 두 팔을 걷어붙일 때면 아직도 나는 대학교 시절 스펙을 가득 채워 대기업에 입사하는 입사의 반복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배운 대로만 할 수밖에 없는 건가. 내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스스로 오늘 하루를 채워가야 한다. 그게 꼭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님에도 완벽하고 싶어 하고 평가받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아직도 나는 직장인의 몸에 밴 일상 속의 마음가짐을 탈탈 버리진 못했다. 

 

나는 어제보다 더 게으른 오늘을 보낸다. 마음 한편에 불안함이 엄습해올 때면 그냥 앉아서 멍 때린다. 뭘 위해서 무엇을 시작할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해나갈 계획이다. 그동안 일했던 시간만큼 놀 수 있다면 한없이 놀 수도 있다. 

불안하면 불안하고 행복하면 행복하다. 모든 건 내 마음먹기 달렸다.

생생한 내 마음의 변화가 놀랍다. 지난 9년 동안 나는 프로젝트 때문에 화가 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웃고 울었다. 불합리한 회사에 분노했고 자그마한 변화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했다. 이제 나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닌 나 자신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고 싶다. 그 시작선에서 아직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시간들에 갇혀있는 내 부분들을 조금씩 꺼내고 있다. 

 

처음 직장인이 되었을 때처럼 처음 백수가 되어 직장인의  습관들을 버리는 것도 한 번쯤 해봐야 하는 경험이다. 단순한 변화가 아닌 내 삶의 기준이 송두리째 바뀌는 중이다. 평생직장을 꿈꾸는 선배들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진 자의  배부른 소리이겠지만 나보다 훨씬 쌓아놓은 게 없는 후배님들은 너무 늦지 않았을 때 변화를 선택하길 바란다. 두리뭉실하게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건 거짓말. 각자의 정답은 있으니 안주하지 말자. 적어도 찍혀서 나가랄 때 지랄할 수 있을 정도의 배짱을 키우든지 돈이라도 실컷 뜯어내서 일 년 정도는 걱정 없이 버티고 새 출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은 옛 직장에 다시 피바람이 불어올 때 대차게 저항하길 바란다. 물론 떠난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그냥 바람으로만 남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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