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이야, 지금 이 회사에서는 더 이상은 비전이 보이지 않아. 아닌 것 같아. 뭔가 새롭게 해보고 싶어. 그냥 이대로 살아가면 후회 할거 같아.
그럼 뭐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게 갑자기 아닌 것 같은 이유는 뭔데? 다들 그렇게 살아. 그래, 원하는 걸 한다고 치자.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그동안은 우리 어떻게 사는데?
뭐, 덜 먹고 덜 사고, 길진 않을 거야. 정 힘들어지면 아버지 회사에 잠깐 기대도 되고, 일단 그만두고 싶어.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당신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이해가 안 가고, 그럼 처음부터 그냥 아버님 회사로 들어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긴 한 거야? 쉬고 싶은 거야? 다른 일을 하면 정말 좋아질 것 같아?
지난 주말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이케아의 아침 식당에서 만난 부부의 대화였다. 얼핏 봐도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부부는 대화가 내게까지 들리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였다. 심도 깊은 부부의 대화는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그저 조곤조곤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였다. 지극히 사적인 대화를 엿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는데 어찌하겠는가. 듣고 말았다.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언젠가 내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했던 적이 있었던 내용이었다.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의 대화는 아내의 일침을 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뭐야? 안정적으로 사는 지금보다 더 나아?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을 그 질문에 남편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정도로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진 않았을 터, 같은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나였지만 남편에게 좀 더 마음이 쏠린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정규 교육에 어쩌면 군대까지 다녀온 성인 남성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30년 넘게 찾아다녔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현재의 직장에, 혹은 직업에 회의가 든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30년 동안의 방황을 되짚어야 하고, 새로운 길을 닦으려면 30년에 버금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현재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도 위대하지만( 40년 만근하고 정년퇴직하신 모든 직장인들 존경합니다.) 스스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모험을 하는 3,40대도 위대하다.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이유는 가족이 딸린 사람들에겐 자신과의 싸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이라는 어깨 위에 걸려있는 책임은 스스로에게 현재의 만족감을 묻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이직이란 무모하게 느껴진다. 이직을 해본 사람은 해봤기에 견뎌야 하는 적응의 시간이, 해본 적 없는 병아리 직장인에게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또 한편으로는 아내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어쩌면 본인의 삶이 남편의 삶에 의해서만 결정되는데 남편이 참고 견디는 것을 아내 또한 참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모르고 있다는 게 속상할 것이다. 직장인으로의 삶을 오랜 기간 살아본 나에게 가정주부인 친구들과 이해의 폭이 완전히 다른 것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그토록 싫고 견디기 힘든 직장 생활의 기회조차 없는 게 주부의 몫이니까. 차라리 안 겪고 안 힘든 게 나을 거라는 나의 이야기가 배부른 소리처럼 듣기 싫다고 했다. 서로의 위치에 서보기 전까지는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저 알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반대로 생각해본다고 자신의 입장이 변하진 않는다.
끝도 없는 평행선은 아마도 남편의 선택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계속되거나 합쳐질 거다. 남편이 말하는 자신의 안정과 아내가 말하는 가족의 안정이 항상 같을 수 없다. 그 책임감이 가족의 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모두가 그 사람만을 목매고 바라보는 것도 괴롭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현실인 것을.
정답은 스스로에게 있다. 내게도 나만의 정답이 있듯이. 부부의 대화에 끼어들어 남편 승! 아내 패!라고 외치고 싶지만 아내가 패하고 나면 가족은 불행하다. 모두가 승을 외치는 선택이 아닌 반쪽의 승리는 부부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둘 중의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끓임 없이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치고 힘든 얘기이고 평행선을 긋더라고 서로의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직장인은 힘을 얻는다.
직장 생활의 원동력이 가족의 안정임을 대부분의 애아빠들, 애엄마들은 인정한다. 하나같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가족사진과 컴퓨터 배경화면의 아이들은 행복한 모습이다. 그 행복이 전염되어 지친 와중에 힘을 주나 보다. 아직 부부이긴 하나 가족이라고 말할 아기가 없는 나로서는 그 행복을 맛보기 전에 회사를 나왔기에 어느 희생이 더 고귀하기에 정답이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부부이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도 하루 10시간 이상, 일주일에 다섯 번의 긴 시간을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노라면 그토록 가까웠던 이에게 시간을 들여 설명하지 않은 이상 점점 거리가 생긴다. 대학교 동기인 친구가 동종업계에 있더라고 나는 갑스러운 대기업이고 친구는 을스러운 하청업체라면 나눌 수 있는 대화에 선이 그어지는 것들이 한두 개가 생기는 것처럼, 얘기의 시작이 늦어질수록 이해하지 못하는 서로에게 불만만 생길 수밖에 없다.
아내인 나와 신랑인 그는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가족의 안정이야 다시 일하면 찾아지겠지라는 아주 안일한 생각으로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주변의 우려는 귀를 틀어막고 들었다. 워낙 자의식이 강한 자식이라 반대하던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했던 지난날 때문인지 나의 부모님은 용돈만 제대로 준다면 상관하지 않으마라는 부담스러운 의견을 조심스레 건네셨을 뿐이다. 남들은 한창 돈을 모으고 가족의 토대가 될 아파트며 차를 사야 하는 시기에 우리는 오토바이를 사고 여행 준비를 한다. 그러다가도 가끔 만나는 세련된 직장여성의 모습에 향수병이 도지기도 한다. 아무리 싫었던 직장생활이라도 나의 일부였던 시간인데 그립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기회비용이 발생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인데도 가끔 직장을 다니면서 준비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상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한다.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당연히 따라붙을 과부하에 따른 부작용을 지워버린다. 선택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것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이는 순간 후회가 시작된다.
기회비용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의 선택에도 나의 선택에도 서로의 지분이 있다. 정답을 찾는 과정에 누군가가 소외된다면 기회비용의 지분을 나눠갖는 것은 부당하다. 옆자리의 부부의 대화 속에 우리가 거쳤던 지난날이 오버랩이 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유의 시간을 거쳤는지는 우리만이 알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회비용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기에 오늘 하루도 충실히 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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