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니 가장 달라진 것은 삶의 여유이다.
내 삶의 여유가 달라졌다. 퇴직으로 생긴 일시적인 금전적인 풍족과 넘쳐나는 시간 때문은 아니다.
대기업에는 보너스라는 게 있다. 08년도에 입사한 이래 선배들의 가장 많은 푸념은 보너스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연말에 받았던 보너스가 때론 연봉의 1/3 정도였을 때 갑자기 늘어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곤 다들 모니터에 사고 싶은 차를 띄워놓았다고 한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그 시기를 경험하지 못한 후배들( 그중의 하나는 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전성기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께 그리워하곤 했다. 더 많은 연봉을 쫒아 대기업으로 들어온 선배들과 후배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다가도 마지막은 월급이나 더 줬으면 좋겠다로 끝맺기 일쑤였다. 남들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다는 건 나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고연봉자를 부러워하는 것의 시작이다. 예술업계 치고 열정 페이 없이 시작하는 분야는 드물 것이다. 10년을 고생해야 어느 정도 기반을 잡는다고 하는데 10년을 이미 보상받고 시작한 대기업의 신입사원들은 정당하게 대우받는다. 당연한 대우를 받았던 나 역시도 언제나 내가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또 다른 권리를 생각했다. 나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과 함께 더 많은 복지와 근무요건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그리고 일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밀려왔다. 생존에 대한 충족이 만족되고 나서야 나는 다음 조건에 대해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정부의 지원금 덕분에 다니고 있는 학원이 있다. 필기만 따놓고 실기를 준비하지 못했던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배우러 가고 있다. 선생님에게 합격의 길을 위한 실질적인 조언을 들으며 다닌 지 이제 한 달을 넘기기 직전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직장인이고 그중 나같이 대기업의 이직예정자(희망퇴직자)는 없다. 야근을 하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친구들을 보면서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로 수업을 시작하다가 처음으로 강사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용보험에 의해 보조받는 모든 것들을 선생님을 받을 수가 없었다. 고용보험에 의해 운영되는 학원의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개인소득자(고용되어있지 않는 형태로 고용보험 미가입)이다. 일정 세금을 학원에서 내주고 고용의 형태가 아닌 개인사업자인데 실질적인 등록증은 없고 개인의 경제활동으로 적용된다. 모두 앉아서 조용하게 색을 섞는 와중에 왜 관행을 고치지 않냐고 힘드시면 어디라도 신고해드리겠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당연한 권리 찾다가 내 생계가 없어지면 어떡하냐며 웃어넘긴다.
거창하게 야망, 포부가 아닌 소박한 꿈이라고 얘기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한 집에 적당한 가족이 모여 앉아 적당하게 살아가는 것.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적당함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아서 (남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어 해서) 힘들어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소박한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박한 삶의 전제조건은 생존이다. 그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제대로 사회가 작동하지 않으니 생존을 위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소박한 삶을 포기하게 되었다. 돈 벌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좋은 생각을 해야 할 나이에 다 늙은 꼰대들이나 하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채워 넣게 되는 것이다. 대기업 다니다 희망퇴직한 나나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강사들이나 생존을 위해 직장을 선택하고 나름 평생을 책임질 계획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생존의 굴레를 짊어지면 그 외의 삶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 정작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할 자신의 가치가 소멸되는 대가로 생존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모두 좋지 않은 현상이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남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을 세워가는 일은 유행처럼 모두가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각자의 생김새처럼 다른 생각들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의 선택 조건에 연봉이 들어가는 거고 나 역시도 선택을 하였고 성공하였고 여기까지 왔다. 희망퇴직으로 처음으로 갖은 여유가 내 지난 선택의 기준이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마도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기준을 먼저 채웠더라면 지금의 여유는 없었겠지. 반대로 삶을 하루하루 휴가처럼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지도.
삶의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하고, 갖고 싶던 장비들을 사고 매일을 놀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한다. 나는 희망퇴직이 안겨준 잔고가 주는 안정감을 느끼며 정부에서 보장하는 실업급여와 재교육을 받고 있다. 다음을 위해 준비하라고 잔뜩 챙겨 놓은 선물 세트 안에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예전과 같이 기업에 고용되어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고연봉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기를 빈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서 세금도 내고 보통의 일상을 보내며 여름의 휴가를 위해 일 년을 보내는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삶을 저당 잡혀버리고 나서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잠깐의 소비 놀이의 여유 외에는 가질 수 있는 게 없다. 여유를 만들기 위해 지금의 삶을 극단적으로 건조하게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함. 백수의 여유가 넘쳐나고 나서야 직장인의 여유는 삶의 팍팍함이 만들어 낸 기형적인 시간임을 깨닫는다.
어쩌면 내 이야기가 지금 절벽에 매달려 어떻게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과거의 '나'와 같은 친구들에겐 가질 거 다 가져본 자가 옛날 기억도 못하고 지껄이는 헛소리 같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은 경험해보면 달라진다. 내가 가고 싶던 대기업도 경험해보니 다름을 알았고, 직장인이 되어 잠깐 떠나는 여행이 얼마나 쉽게 고갈되는 여유인지도 알았다. 휴가를 기다리며 오늘을 버티던 수많은 날들을 지내고 긴 휴식을 접하고 나서야 진짜 여유를 갖는 삶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나와 똑같은 길을 밟아도 다른 사람들도 있다. 내 마음이 다르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백수인 채로.
그래서 이제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적어도 내게 직장을 갖는 게 현재 가지고 있는 백수의 여유를 죽이는 것이라면 뭔가 잘못된 거다. 백수의 여유는 돈과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이다. 화낼 일도 없고 짜증 날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는 그런 세상은 없다. 백수가 돼도 일상의 스트레스는 만연하다. 다만 마음의 대상이 달라졌다. 나에게 관대해졌고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며 가장 중요한 선택도 나를 위해서 하고 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하고 싶은지도 계속해서 궁금하다. 과거의 나, 직장인은 나보다 평가를 해주는 누군가에게 관대하고 일을 하는 나보다 결정하는 누군가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보고 타인의 취향에 나의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그 보상을 연봉으로 받는다. 지금의 나, 백수는 더 이상 받을 보상이 없기에 생존에도 담대해질 수 있다.
겨울의 차가운 기온과 낮은 햇살이 어우러져 동네의 풍경이 정겹다.
백수의 여유가 추운 계절마저도 좋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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