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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취업했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가족끼리 얘기를 하던 중에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엥?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취업을 하셨다고?

 

“취업? 어디요?” 내가 물었다.

 

“그 너 할머니 계신 요양원 알지? 그 옆에 주유소 하나 있잖아. 거기서 세차원을 뽑는다는 거야. 그거 보고 지원했는데 붙어가지고 이번 주부터 일하고 있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으잉? 주유소 세차원이요?” 나랑 동생이 동시에 놀랐다.

 

“우리 집이 이렇게 어려웠어? 제가 과외 열심히 할게요.” 동생이 농담을 던졌다.

 

“그런 거 아니고, 아빠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여기서 배경 설명을 좀 하자면, 우리 아버지는 원래 좀 특이한 삶을 살아오셨다. 아버지는 원래 출판사를 운영하셨다. 그런데 40대가 되자마자 인생 이모작을 하겠다며 사장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빠른 은퇴’를 했다. 인생 전반전을 뛰었으니 앞으로 후반전은 아버지가 살고 싶은 삶을 살겠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 후로 굉장히 다양한 일을 하셨다. 대학원 공부, 클래식 기타 배우기, 사회복지 단체 이사, 집안일, 편찮으신 할머니 챙기기, 책 쓰기, 연극 동호회 등등. 요즘은 사물놀이에 푹 빠져있다. 어쨌든 퇴직 이후로 쭉 아버지의 공식 직업은 ‘주부’였는데, 이번에 ‘세차원’이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버지는 평소 항상 땀 흘려 노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또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해서 알바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재미있으시다는 거였다. 

 

“게다가 내가 낮에 비는 시간이랑 딱 맞으니 얼마나 좋냐.” 아버지가 덧붙였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다. 대기업 다니다가 명예퇴직을 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재취업을 알아보는 데 잘 안돼서 굉장히 우울해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 친구를 만나서 “난 세차원도 하는데 뭐 어떠냐”라고 했더니 “야 그래도 보는 눈이 있지, 나는 너처럼은 못 산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헤어지셨는데, 아버지는 친구의 그런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고, 떳떳하면 된 거지. 못할 게 뭐가 있어?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그 나이가 되어서도 세상의 시선에 너무 맞춰서 사는 거야.
사실 내가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한 걸 수도 있어. 그렇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후회가 없고, 지금 정말 즐거워. 세차 알바도 고되긴 하지만 아주 재미있다”

 

내가 봐도 아버지는 삶을 즐겁게 사신다. 아버지가 완벽하신 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건 분명하다. 

 

여태까지 나는 가족이니까, 옛날부터 봐왔으니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취업 소식을 들은 그날 이후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1년 전쯤이었나, 학교에서 오랜만에 과 동기들을 만났다. 군대 갔다 와서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어서 오래간만에 근황 토크를 했다.
이제 동기들이 다 고학년이라 대화 주제는 딱 정해져 있다. 졸업, 취업이다.
오가는 대화 주제도 ‘그걸 하면 공기업 갈 때 도움이 되는가?’, ‘회계사 시험은 평균 몇 년 정도 걸려서 붙는가?’ ‘이번에 걔는 어디 (회사) 갔냐?’ 등등이었다.
안 보이는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니 다들 행정 고시, 회계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단다. 다들 바쁘다.
그런 대화를 하고 나서 집에 오면 마음 한쪽이 약간 팍팍해진다. ‘나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이런 감정을 한 번쯤은 느껴봤을 거다. 주변 사람들은 ‘뭘 한다, 뭘 한다’하는데 '나는 뭐 하고 있지' 이런 생각.
특히나 이건 한국 사회에서 더 심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책 <여덟 단어>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각각의 ‘틀’(상자)가 있고 모두 그 안에 맞추려 노력한다는 것.

 

“(…)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제각각 딱 맞는 상자를 만들고 모두 그 상자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들이 들어가는 상자가 있다. 그 상자 속에는 어딘가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것이고,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오십 대 남자의 상자 속에는 회사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어야 하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다. 

 

삼십 대 후반의 남자라면, 회사에서 과장쯤 되어있어야 하고, 부인과 아이들 한두 명쯤 -더 완벽하게는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가 있는 집안의 가장이어야 한다.
만약 아이들만 있거나, 부인만 있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이나 걱정에 찬 시선을 받게 된다. 모두 일정한 틀을 만들고 그 틀의 형태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느낌…."

 

나는 이 이야기에 정말 공감한다.
사회는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머릿속에 어떤 일정한 ‘틀’을 넣어준다. 그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호기심이나 걱정에 찬 시선'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틀이 점점 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정해져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하면서 불안해한다.
그러다가 좋아하지 않는 과를 가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직업으로 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인간이었다. 자존감은 좀 강한 편이지만, 항상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서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한마디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이런 사회적 본능을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진로에 관해서는 더 그랬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얽매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자.' 말은 쉽지만 일단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게 제일 어렵다.
어떤 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때 좋아서 그런 건지. 어떤 게 내 생각이고 어떤 게 사회적 기대인 건지. 복잡하게 얽혀있으니까 항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런 고민이 내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일단 계속 새로운 걸 채워 넣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스트레스가 많이 사라졌다. 나도 갑자기 깨달았는데, 그런 생각으로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훨씬 줄었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생각해봤는데, 그 이유는 ’ 다양한 집단에서 살아본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25년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대안학교, 군대, 대학교, 경영 동아리, 스타트업, 유럽 교환학생 등 나름 다양한 집단을 경험해봤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스포츠, 게임일 뿐이고, 세상에는 다양한 룰을 가진 다양한 게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제대로 느낀 게 군대에서였다. 사실 난 학교에서는 나름 잘한다고 인정도 많이 받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군대 가자마자 진짜 매일 혼났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도, 좋아해 주지도 않았다.
진짜 나의 군대 초반 1년은 인생의 최대 암흑기였다. "왜 여기 와선 이러지? 왜 여기서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적응해보려고 노력은 했다.
그런데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군대에서는 전혀 달랐다.

예를 들면 비합리적인 업무 처리 같은 게 있을 때 나는 ‘이게 마음에 안 든다’ '이걸 어떻게 바꾸고 싶다' ‘왜 이래야 되지?'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군대에서는 그런 건 일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으로 봤다. 군말 없이 그 시간에 할 일 하는 놈을 예뻐한다.

자괴감에 빠져있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여기는 내가 뛰던 게임이랑 다른 게임을 하는 곳이구나. 단지 룰이 다를 뿐이구나.’ 그 후로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물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존감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유럽에 교환학생을 갔다. 거기서도 완전히 생각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유럽에서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환학생을 하면서 만난 유럽 사람들은 삶의 방식이 정말 다양했다.
처음 들어보는 다양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 20대 대학생들이랑 스스럼없이 노는 40대 아저씨, 타투를 한 교수... 나의 좁은 눈으로는 새로운 것 투성이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그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사람들이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유럽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인생에 관심이 별로 없다.
‘니 인생은 니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이런 마인드가 강하다. 그래서 남이 어떻게 살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교환학생 1년 동안 나는 ‘세상에 정해진 삶의 방식은 없다’라는 걸 제대로 배웠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에 살아보면서 배운 것, 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는 주부 15년 차 아버지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게임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어떤 게임의 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삶의 범위와 방식들은 생각보다 당연한 게 아니다. 지구 상에는 다양한 사회가 있다. 그리고 각 사회에는 그 사회의 틀, 기준, 규칙이 있다. 서로 다른 스포츠 종목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속한 종목에서 열심히 뛴다. 하지만 그 게임의 룰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인 다양한 게임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손을 쓰는 걸 좋아하거나 잘 하는 사람인데 ‘축구’를 열심히 뛰면서 힘들다면, 그건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얼른 가서 ‘농구’를 뛰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축구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이 ‘축구 말고 운동이냐?’라는 식으로 얘기해도, 종목을 바꿔야 한다. 그건 내 게임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 바꿀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는 게임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즐거운 인생을 산다. 설명 그게 남들이 보기에는 ‘뭐 하는 거야?’ 싶은 비인기 종목일 수도 있다. 

 

세상에 다양한 게임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한다.
최저 시급 받는 세차 알바는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운 일일 수 있지만, 우리 아버지에게는 하고 싶어서 하는 재미있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건 이해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내 머릿속의 많은 생각들은 사회의 영향을 깊이 받기 때문이다. 이해는 해도 깊이 새겨지진 않을 때가 많다.
이럴 땐 글을 쓰면 좀 도움이 된다. 파편적인 생각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말이 되게 써내려 가다 보면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 글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깝다.



모두가 각자의 게임을 뛰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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