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마스트리흐트 대학교(Maastricht University, UM)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Problem Based Learning (PBL)이라는 방법으로 거의 모든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PBL은 UM이 홍보하는 왜 UM인가? (Why UM?)의 2가지 축 중 하나다. 1976년에 처음 설립되었을 때부터 PBL을 사용해왔고, 네덜란드의 다른 대학교들도 UM을 따라서 이 PBL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처: 마스트리흐트 대학교 공식 홈페이지)
실제로 주변 친구들한테 ‘너 왜 마스트리흐트 대학에 왔니?’라고 물어보면 3분의 1 정도가 PBL 방식에 흥미를 느껴서라고 대답한다. 동시에 신입생과 교환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토론 문화가 더 널리 퍼져있는 서양 친구들도 PBL은 낯설어한다. (물론 한국인은 더욱더 낯설어한다.) 게다가 Lecture 형식 수업보다 평소 로드가 훨씬 세다. 하지만 나는 PBL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Problem Based Learning이란?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PBL은 ‘토론식 수업’이다. 10명 내외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그룹 내에서 Discussion을 중심으로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룹 내에는 Tutor, Discussion leader, Note taker라는 3가지 Role이 있다. 수업을 기획한 교수는 학생들의 토론을 보조해주는 Tutor의 역할을 맡는다. Discussion leader는 전체 토론을 조율하고 논의를 이끌어가는 사회자 역할이다. Note taker는 토의 내용을 칠판에 기록한다. Discussion leader와 Note taker는 매 시간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맡게 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사회자, 서기인 셈이다.
PBL은 다음과 같은 7가지 단계를 거친다
1. Clarifying terms (용어 설명)
그룹이 모이게 되면 맨 처음 그 날 수업에 해당되는 Case을 읽는다. 일반적으로 Case에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다양한 묘사한 글들이 짤막하게 인용되어있다. 다 같이 읽고나서 Discussion leader는 Case에 대해서 애매모호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 있는지 확인한다. 대답은 주로 다른 학생들이 해주고, Tutor가 해주는 경우도 있다.
2. Defining the problem (문제 정의)
이 Case에서 우리가 대답해야할 질문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Case에 Development라는 개념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나와있다면 ‘Development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같은 Problem Statement를 뽑아내게 된다. 문제 정의에 정답은 없지만 내가 여태까지 경험한 대부분의 Case는 주제가 명확한 것들이어서 보통 이 단계에서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 Brainstorming (브레인스토밍)
자기가 이 문제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들,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나는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다’ 라든가,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의 내용을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 탄탄한 근거나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각자 아이디어를 던지는 선에서 그친다. 그리고 Note taker는 열심히 이걸 받아 적는다.
4. Clustering (클러스터링)
Brainstorming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을 그룹핑하는 과정이다. 관련되는 내용끼리 묶고, 큰 아이디어에 포함되는 작은 아이디어를 밑으로 넣기도 한다.
5. Learning Goal setting (학습 목표 설정)
Clustering을 거치고 나면, 이제 Problem Statement를 해결하기 위한 Sub question들을 뽑아내게 되는데, 이것을 Learning Goal이라고 한다. 모여진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5-6개 정도의 세부 질문을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다. 여기까지가 그룹으로 진행되는 Pre-discussion이다.
6. Self-learning
Pre-discussion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Learning Goal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아온다. Unit별로 이미 핵심적으로 읽어야할 자료 (논문, 저널, 기사 등)들이 제시되어있다. 제시된 자료를 읽고 자기 나름대로 learning goal에 대한 대답을 요약, 정리해야 한다. 가장 긴 시간을 차지하는 단계다.
7. Post-discussion
다음 수업 시간에 모여서 Discussion Leader의 진행 하에 각 Sub question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토론하고 종합한다.
PBL의 장점은 무엇인가?
많은 장점이 있겠지만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PBL의 핵심은, 학생들에게 정보를 구조화하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강의의 기반이 되는 교과서는 관련된 모든 지식을 저자의 생각대로 구조화해놓은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를 읽는 학생은 지식 그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구조는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교과서를 쓰지 않는 강의 (Lecture) 방식이라 하더라도 교수가 이미 구조화해놓은 내용을 배운다.
그런데 PBL에서는 학생 스스로가 문제에 대답하기 위한 자료(Raw meterial)를 읽은 뒤에 정보를 스스로 구조화해야한다. 물론 Tutor에 의해 수업이 설계되어있고 중요한 자료의 리스트도 첨부되어있기 때문에 100% 현실적인 문제 해결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가이드는 있어야 한다.)
하지만 Learning Goal은 학생들이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그 문제에 어떤 식으로 대답하느냐도 각각 학생들마다 모두 다르다. 여러가지 자료들을 읽다보면 필요한 정보들이 튀어나온다.
중요한 것은 그 자료를 복사 붙여넣기 해서는 답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A 논문에 나온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B 기사에 나온 내용을 사례로 제시하고, C 저널의 칼럼을 반대 의견으로 인용하는 등의 과정을 스스로 해야한다. 그러려면 제시된 Case와 문제 정의를 바탕으로 정보를 재구조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 방법이 정말로 큰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조화는 실전에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해결 상황(Problem Solving)에서 아주 중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구조화된 문제와 비구조화된 문제가 있다. 구조화된 문제란 수학 시험 문제나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치는 것처럼 답을 찾는 절차와 방법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반면, 비구조화된 문제는 기업의 경영 문제나 개인의 진로 선택 처럼 표준화된 해법이 없는 문제다. 우리가 교과서에 나온 문제들을 열심히 풀어도 실생활의 문제 해결 능력이 잘 향상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실전에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들은 대부분 비구조화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풀어아할, 또는 풀 가치가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교과서의 연습 문제처럼 구조화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구조화된 문제를 나름의 논리로 쪼개고 묶은 뒤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야 한다.
(경영컨설팅 회사에서 사용하는 문제 해결 방법론인) 전략적 사고에서도 문제의 구조화를 가장 강조한다. 컨설팅식 문제 해결 방법론에서는 문제의 구조화를 위해 ‘MECE’한 ‘이슈 트리Issue tree’를 만들라고 한다. ’MECE’란 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의 약자로서 전체를 포괄하되 항목들이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MECE를 생각하며 문제를 쪼갠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Issue tree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아이디어이다. 막연히 바라보면 매우 복잡해 보이는 문제(비구조화된 문제)도 나름의 구조(structure)를 적용해서 분석해 들어가면 해결 가능한 작은 덩어리들로 쪼개어지면서 문제점 전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해결책도 쉽게 떠오른다는 것이 이 접근법의 핵심이다. 이는 굳이 경영 문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
구조화된 매뉴얼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반복적으로 숙달하는 능력은 점점 더 쓸모없어지고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개인이 갖춰야할 능력은 이미 만들어저있는 매뉴얼에 대한 숙달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야할 정말 중요한 능력은, 구조화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에서 자신만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지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 이 개인에 의해 창조되고, 구성되고, 재조직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PBL이 상당히 좋은 학습방법이라고 생각한다.
PBL의 한계점
이렇게 들으면 PBL이 이상적인 교육 방법 같지만,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이 실행 단계에서는 많은 한계점들이 있다.
1. 어떤 분야의 경우 PBL 방식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이 이미 명확한 위계나 구조가 존재하는 학문이거나, 아니면 강사의 판단에 따라 개념과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PBL을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물론 토론식 수업의 형태를 하지만 실제로는 교과서의 이론을 학습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Maastricht University의 수업은 모두 PBL이지만, 실상은 과목에 따라서 정도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 분야 같이 다양한 의견과 논증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아주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2. Pre-discussion이 많이 부족하다.
앞서 말했듯이 PBL은 크게 보면 두 단계가 있다. 배경지식 없이 문제를 정의하고 아이디어를 발산하고 그것을 묶어서 세부 질문으로 쪼개는 Pre-discussion과 각자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답을 토론하는 Post-discussion이다. 내가 여태까지 들어온 문제 해결 방법론의 경우 하나 같이 Pre-discussion의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실제 PBL 수업의 경우, (모든 수업을 다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Pre-discussion이 영 수박겉핥기 식으로 진행된다. 실전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Problem statement단계를 보면, 일단 정의된 ‘문제'가 대부분 ‘문제’나 ‘Case’라고 하기 어렵다. 이미 제시된 유닛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화와 식량 안보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이 Problem Statement로 등장하게 된다. 대부분 Fact를 물어보는 질문이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번 과의 ‘학습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문제 정의가 굉장히 중요한 단계이지만 그냥 한 사람이 던진 Problem statement를 던지면 십중팔구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이미 배워야할 내용과 이론이 어느 정도 설계되어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문제로 정의해야할지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Brainstorming이나 Clustering 단계도 시간 없으니 요행껏 하고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좀 더 나은 PBL을 위해서는 Pre-discussion에 더 많은 노력이 할당되어야 한다.
만일 내게 나무를 베기 위해 한시간만 주어진다면 우선 나는 도끼를 가는데 45분을 쓸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나에게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데 55분의 시간을 쓰고, 해결책을 찾는 데 나머지 5분을 쓸 것이다.
-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해법 지향’이 아니라 ‘문제 지향’이어야 한다. (…) 답을 찾는 것보다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해결사>, 유정식, 2011
문제를 파악하는 단계(P-code)가 7, 해법을 찾는 단계가(S-code)가 3인 것이 적당합니다.
<기획은 2형식이다>, 남충식, 2014
3. 참여자의 역량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기 의견 말하기 좋아하는 게 서양 사람들 특징이라고 들었는데, 실제 수업에 가보니 여전히 말 안하는 사람은 있다. 두 가지 중 하나다. 자기 의견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수줍은 성격이거나, 수업 준비(Reading)을 하지 않았거나.
그룹에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경우 학습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래서 어떤 수업은 주제가 굉장히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론할때마다 어색하고 지루하고, 반면 주제가 재미없더라도 모두가 열성적으로 의견을 내고 참여하는 분위기인 경우 굉장히 알차게 진행된다.
또한 Tutor와 Discussion leader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 진행된 학생회 forum에서 나온 의견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discussion leader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뭘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확실히 discussion leader는 상당히 어려운 역할이다. 아무래도 학생들 대부분이 native는 아니다보니 (그래도 대부분 잘하지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될 때가 있다. 그 때 훌륭한 discussion leader는 의견을 명확하게 요약해주고 토론이 생산적으로 진행되도록 이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잘 못한다. (나를 포함해서)
Tutor의 역할은 사람에 따라 무척 다르다. 내가 본 Tutor들 중에서는 자주 개입해서 학생들에게 책에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Tutor도 있었고, 학생들이 마음껏 토론하도록 내버려두는 Tutor도 있었다. Tutor가 토론이 잘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facilitator의 역할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토론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3줄 요약
PBL은 마스트리흐트 대학교가 사용하는 문제해결 중심 학습법이며 총 7단계로 이루어진 토론식 수업 방식이다.
PBL은 스스로 질문을 정의하고 답을 직접 찾는 과정에서 지식을 구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준다.
실제 경험해본 결과 모든 수업에서 100% 활용되지는 않으며, Pre-discussion 단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그룹 멤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한계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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