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말하기'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처음 마스트리흐트에 도착해서 맞닥뜨린 가장 큰 시련이었다.
물론 영어가 술술 나올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와 진짜 영어 회화는 다르다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 그것보다도 심각했다는 거다. 네덜란드에 도착해서 처음 몇 주 동안,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답답함이 계속 나를 짓눌렀다. 인생에서 영어로 말을 하지 못해서 불편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아서 우물쭈물하고 넘어가는 일이 계속되었다. 절대 소심한 성격이 아닌 내가 사람들과 만나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낄 정도였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생각하다 보니 10분만 다른 사람과 대화해도 진이 빠지곤 했다.
처음 몇 주가 지나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서 영어 대화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영어는 입에서 튀어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수업이었다. 내가 잘 아는 주제가 나왔다. 호기롭게 입을 떼었다.
“Umm.. you know? This idea is …”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설명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다. 분명히 내 머릿속에 있는 개념은 대학생 수준이었는데, 그걸 마음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방에 돌아와서 든 생각은 '억울함'이었다. 정말 억울했다. '내가 한국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했는데, 여기 와서 이 정도 말도 못 하나?' '나는 영어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러면 학교는 도대체 뭘 가르쳤단 말이냐' '영어를 잘하려면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은 며칠에 한 번씩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항상 불편했다.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시도해봤다.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주로 인터넷을 이용했다. 평소에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쳤던 영어 학습 콘텐츠들을 깊게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영어를 익히는 올바른 관점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내가 영어 고수는 아니지만, 영어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한 마디만 하라면 이 말을 하고 싶다.
영어는 반복을 통해 ‘체득'하는 암묵적 지식(Implicit knowledge)이다.
정말 정말 단순하지만, 왜 여태까지 이걸 생각해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깨달음이다.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모든 강사들,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암묵적 지식이란?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명시적 지식 (Explicit)은 사실을 암기하거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이해하는 지식이다.
암묵적 지식은 (Implicity knowledge)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몸으로 체득하는 지식이다.
역사, 과학, 수학 같이 ‘공부’하는 지식이 명시적 지식이고, 바이올린 연주, 골프, 젓가락질, 자전거 타기 등 ‘훈련’하는 지식이 암묵적 지식이다.
암묵적 지식은 얻는 방법이 다르다
우리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 때 국어 영어 수학을 똑같이 공부한다. 즉 영어를 '공부' 한다는 말은, 문법 지식을 암기하고, 지문을 읽고 내용을 추론하는 연습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어 회화'를 잘하고자 한다면 이건 아주 잘못된 접근이다. 영어 회화는 ‘훈련’해야 한다.
암묵적 지식의 특징은 부단한 반복을 통해서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반사적으로 반응이 나오도록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전거를 배울 때 자전거의 원리를 공부하고 타지 않는다. 급커브가 나타났을 때 자전거의 가속도와 관성을 고려해서 핸들의 각도를 틀지 않는다. 직접 하면서 배웠고,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므로 영어를 암기와 이해로 배운 내가 실제 회화를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지만 말하기와 쓰기, 즉 Output은 전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어를 잘 하는 비결은 끊임없이 큰 소리로 반복해서 연습해서 입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Writing이라면 많이 써야 한다.) 얼핏 들으면 비결이라 하기에도 우스운 말이다. 하지만 이게 모든 영어 강사들이 말하는 진리의 영어 학습 방법이다. 원어민의 말을 듣고 똑같이 크게 따라 한다. 10번이고 100번이고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핵심이다.
영어는 ‘체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왜 영어에는 왕도가 없는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영어 가르친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이것만 잘하면 말문이 트인다는 책들이 서점에 깔렸는데, 모든 사람이 영어를 거의 10년 동안 배우는데, 왜 여전히 온 국민이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지 알게 된다.
왜냐하면 결국 영어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특징으로 연결되는데,
첫 번째,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 아주아주 지루하다.
암묵적 지식은 아무리 스타강사가 와서 가르치고 베스트셀러 교재로 공부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우리가 가르쳐줄게.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라는 메시지에 혹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학원, 좋은 선생님, 좋은 교재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가 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 시장이 돈을 잘 버는 이유인 듯하다.
영어를 ‘체득’하는 과정은 지루하다. 무식한 반복이 최강의 체득 방법이다. 물론 어떻게 하느냐, 어떤 태도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지루할 수밖에 없다. 강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쉽지 않다.
더욱 큰 문제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기가 어렵다. 열심히 한 달 해봐도 내가 늘었는지 안 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포기하기가 쉽다.
초등학교 때 ‘윤선생 영어’를 들은 적이 있다. 1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이 집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초등학생 수준의 스토리를 영어로 몇 번 이상 읽은 뒤에 그걸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거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게, 그 숙제가 너무너무 지겹고 하기 싫었다. 이걸 해서 뭐가 달라지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서 그 숙제를 피하려고 온갖 요령을 피웠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요즘 그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건 적어도 그 방법이 기본적으로는 옳았다는 거다. 영어 문법과 어휘를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스토리를 듣고 따라 읽고 녹음해서 내 목소리를 확인하는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결국 ‘어떻게 지속하느냐'
즉, 영어는 공부하는(學) 것이 아니라 익히는(習) 것이며, 가르치는 ‘티칭’이 아니라 훈련을 돕는 ‘코칭’이 중요하다. 영어는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에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처럼 '훈련하는 것'이다.
간단한 결론이다. 그러나 결코 쉽지가 않다.
이것은 영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암묵적 지식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반복 훈련을 통해 체득해라, 그런 말은 누가 못 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정말 중요한 점은, 다 알고 있는 그 방법을 꾸준히 지속하고, 실제로 이 훈련이 가져오는 변화를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백날 이거 하면 영어 된다 하는 수많은 글들은 그저 말일뿐이다.
반복 훈련을 통한 체득 과정을 어떻게 하면 습관화시키고, 조금 더 재밌게 해서, 어떻게 꾸준히 하느냐, 그게 진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쓴 이 글도 ‘영어를 잘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저 영어를 어떻게 배워야 하느냐는 ‘관점’ 일뿐이다. 결국 영어 습득은 스스로의 실천과 의지에 달려있다. ‘맞는 말이지’하고 넘어가는 사람과, 실제로 꾸준하게 실천하는 사람의 차이가 영어를 습득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이게 내가 교환학생을 와서 얻은 영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3줄 요약
영어는 수학, 과학처럼 공부하는 과목이 아니라 자전거 타기, 젓가락질처럼 반복을 통해 체득하는 과목이다.
그러므로 '영어 말하기'를 잘하려면 '영어 말하기'를 아주 많이 해야 한다.
초반에 지루하고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 구간을 견뎌내는 것이 습득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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