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사회과학 책을 좋아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경제학 관련 책을 열심히 읽었다. 경제학 책들은 경제 논리와 경제 체제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 시스템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경제 성장만을 추구해온 결과로 사회적, 환경적 문제들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사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깊이 생각했다. 막연한 문제의식이었지만 나는 자본주의가 일으킨 문제점을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
그러다가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회적 기업 중 하나인 그라민 은행의 이야기를 담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를 읽으면서였다. 또, 인도의 아라빈드 안과와 아쇼카를 창립한 빌 드레이튼의 사례 등이 담긴 <세상을 바꾸는 80인의 대안기업가> 같은 책들을 인상 깊게 읽었다. 당시에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라 국내 사례에 대한 책들도 많았다. 사회적 기업의 모토인 ‘비즈니스를 활용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업뿐 아니라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등 ‘사회적 경제’에 관련된 책들을 탐독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사회적 경제’가 하나의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마음속에서 ‘나도 이런 일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자라났다. 나는 경제학이 재미있었고, 그래서 경제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NGO 인턴: 현실에서 사회적 기업을 보다
NGO 인턴을 하게 된 이유
대학생이 되었다. 많은 새내기들이 그렇듯이 1학년 때는 열심히 술 퍼먹고 놀았다. 대학교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1년이 지나갔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 겨울방학 때 뭘 해야 할까 생각하던 중에 고등학생 때 썼던 생각노트와 독후감 노트를 다시 읽어보았다. 확 정신이 들었다. 나름 공부 시간을 쪼개가며 진지하게 쓴 그 글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대학에 왔는지 일깨워줬다. 1년 동안 열심히 놀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할 시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뭐지?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저 책으로만 접했을 뿐이었다. ‘사회적 경제’를 실제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봤다. 어떤 은행이 사회공헌 사업으로 진행하는 ‘NGO 인턴쉽’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대학생들을 선발해 NGO 단체에 인턴으로 보내고 돈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인턴? 약간 망설였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인턴이란 고학년들이 졸업이 가까워서 취업 준비할 때 하는 그런 미지의 무언가였다. 주변 동기들 중에 인턴을 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을 즐기는 편이라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지원을 했고 2달 동안 인턴쉽을 할 기관을 안내받았다.
무슨 일을 했는가?
내가 배정된 곳은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였다. 사회적 기업의 글로벌 대명사인 ‘그라민 뱅크’의 한국 버전이었다. (사실 꽤 다르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책에서만 보던 그라민 은행 같은 사업을 하는 곳이 한국에도 있구나. 나의 가슴은 실전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은 기대와는 달랐다.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낙동강 오리알 같은 느낌이었다. 인턴을 위해 짜인 체계가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일손이 온다니까 받긴 받았는데 인턴을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자 SNS에 글을 쓰기도 하고 스스로 기획한 홍보 영상도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교 새내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회적 기업 컨설팅을 하는 부설 연구소로 소속이 옮겨졌다. 연구소라는 말이 붙어있었지만 사실 직원 3명의 작은 팀이었다. (나중에 안 건데 연구소라고 이름을 붙이면 세제 혜택이 있어서 어떤 중소기업은 휴게실에다 연구소라고 붙여놓기도 한다고 한다.)
아무튼 연구소장님과 지나가면서 몇 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인턴 업무가 딱히 없는 걸 알고 데려가서 일을 시켜보고 싶다고 하셨던 것 같다. 주요 업무는 정부에서 하는 ‘사회적기업 경엉지원 사업’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사회적 기업 지원사업이란 주로 정부 기관에서 사회적 기업의 경영을 돕기 위해 사회적기업을 컨설팅해줄 업체를 찾아 계약을 하고 대신 그 비용을 내주는 사업이다. 물론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자리를 옮겼다.
나는 연구소에서 리서치와 데이터 베이스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소장님이 컨설팅하는 업체에 가져갈 자료들을 만들거나, 사회적 기업 관련 유통 채널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2개월의 공식적인 인턴기간도 끝났지만, 소장님의 권유로 계속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병행했다. 총 6개월 정도 일을 했다. 현장에서 직접 여러 사회적기업을 보면서 느낀 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배운 것, 사회적 기업의 스펙트럼
원래 나에게 사회적 기업이란 단순히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는 멋있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컨설팅을 하면서 본 회사들은 내가 생각한 모습과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에 있는 '사회적기업'의 대부분은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연구소의 컨설팅 대상도 주로 취약 계층을 고용한 떡집, 모자 가게, 청소 용역 업체 등이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당시에 내가 봤던 기업들이 대부분 그랬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기업은 정부가 인증한 '사회적기업'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인증 제도가 있다. 사회적기업 인증 제도에 정의된 사회적 기업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기업의 유형>
① 일자리제공형 : 조직의 주된 목적이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
② 사회서비스제공형 : 조직의 주된 목적이 취약계층에게 사회서비스를 제공
③ 지역사회공헌형 : 조직의 주된 목적이 지역사회에 공헌
④ 혼합형 : 조직의 주된 목적이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과 사회서비스 제공이 혼합
⑤ 기타형 : 사회적 목적의 실현 여부를 계량화하여 판단하기 곤란한 경우
그러므로 취약 계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아니면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가? 아니면 지역 경제 활성화에 공헌하는가? 가 공식적인 ‘사회적 기업’의 기준이었다.
미묘한 차이를 깨닫고부터 ‘사회적기업이란 무엇인가’란 고민을 했다. 나는 책에서 혁신적인 사업 모델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들을 보며 사회적기업이란 다 그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굉장히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수많은 형태가 있는 분야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적기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논의가 있다.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 연관된 개념들도 엄청나게 많다. 나라별로도 다 조금씩 다르다. (Social business, Social enterprise, 소셜벤처, 커뮤니티 비즈니스, 마을기업, 공동체기업, 지역공동체이익회사 등등)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차이는 ‘새로운 균형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인지 아닌지이다. 임팩트 비즈니스 리뷰(ibr.kr)에 따르면 사회적 가치 창출 행위를 두 가지 축으로 나눈다. 새로운 균형을 창출하는 행위인지 아닌지, 직접적 행동인지 간접적 행동인지에 따라 ‘사회서비스 제공’, ‘사회적기업’, ‘사회적 행동주의’를 분류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차이는 ‘사회 서비스 제공’과 ‘사회적기업’의 차이다. 사회적 서비스 제공은 올바르지 못한 균형 상태를 인식하고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적기업과 유사하다. 하지만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소셜벤처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소셜벤처는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사회적기업과 달리 벤처 기업의 성격을 띠고 혁신(새로운 균형의 창출)을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가 뭉뚱그려 ‘사회적 기업’이라고 생각했던 ‘비즈니스를 통한 사회 문제 해결’은 이 점에서 두 가지로 나뉜다. 크게 볼 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자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포커스를 둔 기업이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어느 쪽에 더 가깝냐일 뿐, 딱 떨어지는 분류는 아니다.
사회적기업은 어떤 정리된 데이터나 이론이 이끌어가는 분야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회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분야다. 따라서 사회적기업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나는 나는 둘 중 어떤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둘 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로써 생각해봤을 때 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을 만들어내는 일이 더 끌렸다. 그래서 질문을 이렇게 재정의했다.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번째 배운 것, 사회적 기업은 ‘비즈니스’다
컨설팅을 해보면 대부분의 클라이언트 기업들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소셜 비즈니스에 ‘소셜’은 다 있는데 ‘비즈니스’가 없었다. 즉, 사회적 기업에는 ‘기업가’나 ‘경영 전문가’가 부족했다. 사회적기업의 특성상 비영리 기관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다. 사회복지 관련 기관 등에서 진행하는 자활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아무래도 이런 사업을 이끌어가는 분들은 ‘기업가’이기보다는 ‘활동가’인 경향이 강했다. 또는 일반 자영업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전환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분들도 ‘기업’보다는 ‘장사’의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익을 창출하는 사회적기업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소장님은 항상 ‘사회적 기업도 비즈니스다’를 강조하시곤 했다. 이윤 창출을 절대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지속 가능한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윤을 만들어내야 했다.
최근에 사회적기업이나 소셜 벤처에 관한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누구나 이 점을 강조한다.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성장 가능한 사업 모델을 명확하게 설계해두고 시작해야 한다”, “시장은 소셜벤처라고 해서 더 잘 봐주는 곳이 아니다” 같은 조언이 많다. ('착한' 소셜벤처를 향한 조언 “소셜벤처도 사업”)
그렇다면 ‘경영’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경영’은 생소한 분야였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술’, ‘마케팅’, ‘회계’ 정도였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나서부터는 컨설팅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여러 지식들을 주워 들었고, 난생처음 경영학에 대한 책도 읽어보고, 학교에서 ‘경영학개론’을 신청해서 듣기도 했다. 개론 수업은 으레 그렇듯이 별 내용은 없었지만, 적어도 경영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영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론은 내가 앞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회적 기업을 하고자 한다면 ‘경영’의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사회 문제는 누구나 볼 수 있다. 아이디어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현실로 옮기고, 지속 가능한 사업을 만들어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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