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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찍었던 사진을 벽에 붙여놓았다. 사진들을 쭉 훑어보니 후회 없이, 재밌게, 알차게 보내고 온 것 같아 흐뭇했다. 곧 마스트리흐트와 그곳 친구들이 그리워질 것 같다.

 

서울에 도착하고 한 1주일 동안 묘한 경험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서울이라는 익숙한 공간인데도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익숙한 공간에 돌아왔다는 편안함도 느껴졌지만, 동시에 묘하게 낯설었다.

 

처음 유럽에 갔을 때는 정말 모든 게 낯설었다. 네덜란드와 한국은 지나다니는 사람들, 가게들, 분위기가 전부 달랐다. 그런데 그곳에서 1년을 보내고 네덜란드의 환경에 익숙해지고 나서 한국에 오니 평소에는 당연하게 느꼈던 서울의 풍경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엄청나게 크고 촘촘한 간판들 화려한 광고판, 2층, 3층까지 올라가 있는 음식점, 사람들의 옷차림, 건물마다 하나씩 있는 카페… 유럽에 가기 전에는 너무 익숙해서 이게 특징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서울의 독특한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단순히 풍경만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말, 생각도 외국과 정말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여행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경험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왔을 때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져 있다. 평소에 내 주변에 있었던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보게 된다. 특히나 관광 여행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장소에서 진짜 ‘살아보고’ 왔다면 더욱 그렇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면 좋은 점이 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들어온 특정한 삶의 ‘틀’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틀’에서 자유로워진 게 교환학생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지 않나 싶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 그는 나의 이런 경험과 정반대 되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제각각 딱 맞는 상자를 만들고 모두들 그 상자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들이 들어가는 상자가 있다. 그 상자 속에는 어딘가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것이고, 여자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오십 대 남자의 상자 속에는 회사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어야 하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가 있다.

삼십 대 후반의 남자라면, 회사에서 과장쯤 되어있어야 하고, 부인과 아이들 한두 명쯤 -더 완벽하게는 남자아이 하나 여자 아이 하나-이 있는 집안의 가장이어야 한다.

만약 아이들만 있거나, 부인만 있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기심 내지 걱정에 찬 시선을 받게 된다. 모두들 일정한 틀을 만들고 그 틀의 형태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느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자’가 있다는 이야기에 공감할 것이다. 명절 증후군이 그래서 생긴 것 아니겠는가? 

고등학생에게는 ‘공부 잘하니?’
대학생에게는 ‘취업은 어떻게 하고 있니?’
취업하면 ‘결혼은 언제 하니?’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어느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이런 '상자'를 23년간 넣고 다녔던 평범한 한국 촌놈에게 외국 생활은 상식 파괴의 연속이었다. 유럽에서 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다양한 가치관, 다양한 문화를 봤다. 그리고 유럽 사람들은 그런 다양성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일정한 ‘틀’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유별난 사람’들은 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유별난 사람’들이 훨씬 당당하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 삶은 각자가 사는 거니까.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유별난 사람’들에게 유별나게 관심이 많다. 특별히 말은 하지 않아도 분위기나 환경이 그렇다. 유별나게 살기가 참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다. 나도 여태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교환학생을 다녀와서는 나도 모르게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따르고 있는 고정관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런 고정관념에서 한결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내가 23년간 우리나라에서 배웠던,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틀’들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려고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쪽이 편하고 큰길일지는 모르지만, 내 길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어떤 ‘틀’에 대해서 가치를 판단하는 건 아니다. 유럽은 개성을 존중하니까 좋은 사회고 우리나라는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니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틀’을 무시하고 살자는 얘기도 아니다. 외국 사회도 각자 사회에 존재하는 ‘틀’이 당연히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회일 뿐 거기에 옳고 그름이란 없다.

 

다만 그것을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고 내면화하는 것을 경계했으면 좋겠다. 세상에 당연한 건 별로 없다. 그러므로 꼭 남들이 얘기하는 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게 되면 묘한 해방감과 함께 자존감이 높아진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취업을 못하다니.’
‘나는 술을 마시기 싫은데 그러면 사회생활에 지장 있는 거 아닐까.’ 
‘남들 다 시험 준비해야 하는 데 나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흔한 스트레스도 결국 ‘틀’에 맞춰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압박감에서 나온다.

 

나도 물론 여전히 미래 걱정을 하고, 준비도 한다. 하지만 교환학생을 다녀와서 그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는 많이 없어졌다. 꼭 정상적인 트랙을 밟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아니 애초에 ‘정상적’인 트랙이란 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환학생 경험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다.

 


화란견문록은 여기서 마친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생각을 많이 하고 글로 정리하는 게 글쓰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쓰면서 쓸 거리를 고민하고 구성을 고민하면서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글을 쓰지 않았으면 나의 ‘화란견문’은 훨씬 얕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다른 매거진을 통해 꾸준히 글쓰기를 할 생각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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