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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봐라, 머리 좋은 놈 따라가나."

"아무리 머리 좋아봐라, 운 좋은 놈 따라가나."

인생에서 고3 은 참 여러 가지로 기억에 남는 1년이다. 공부에 매진하거나, 포기하고 놀거나, 혹은 걷잡을 수 없는 사춘기의 구렁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어떤 한 해든. 

그 세 가지를 적절히 타협적으로 얼버무린 1년을 보내던 어느 날 참고서를 사러 들른 서점에서 한 책을 발견했다. 워낙 오래전이라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우리나라 각 대학교의 화장실과 동아리 방 등에서 수집한 다양한 낙서들을 모아놓은 시집 형태의 작은 책. 주저 없이 사들고 단숨에 끝까지 읽어해 치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치기 어리고 조금은 유치한 글귀 들이었겠지만 고3 에게는 모든 문구들이 성경이나 불경은 비교도 안 되는 혜안이 어린 글들로 보였다.

그중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아직도 기억나는 짤막한 두 줄짜리 낙서 하나 -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봐라, 머리 좋은 놈 따라가나. 아무리 머리 좋아바와, 운 좋은 놈 따라가나." 열심히 공부하던 고3 에게는 너무 아픈 말이었고 열심히 공부하는 게 인생에서 의미가 있을까 며칠 동안 고민하게 만든 글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뿐이랴. 사회에 나오면 공부에 비할 수 없이 운이 중요한 상황들이 전개된다. 

5번의 이직을 거쳤지만 한 번도 이직이 쉬웠던 적은 없다. 특히 그 과정에서 내가 제어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황들이 더욱 힘들게 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힘들게 몇 번의 면접을 거쳐서 이직이 결정되고 막 연봉이 적힌 오퍼에 사인하려고 할 때 걸려온 전화 - "죄송합니다만... 저희 회사가 이번에 전체적으로 Headcount(인력) 이 Freezing(동결) 되었습니다. 당장은 채용이 힘들 것 같습니다."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의 잘못도 아니고 내 노력으로 제어가 안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운이라 부른다. 정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나쁘면 어쩔 수 없다. 이직이든 승진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지점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이 개입한다. 그 사람이 내 곁의 사람일 수도, 저 멀리 보이는 임원일 수도, 혹은 아예 모르는 저 본사의 CEO일 때도 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내 운명을 결정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첫 째,
아주 까마득한 신입 사원 때.  국내 모 그룹 회사에 다닌 지 1년이 채 안 되는 때였다. 연구소 아주 층이 큰 널찍한 건물이었고 대략 10개가 넘는 부서가 한 층을 다 쓰고 있었다.
하루는 사무실 바깥 복도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커다란 철문을 열었고, 문을 나서는 순간 무심코 문을 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바로 뒤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왠지 사람이 있을 듯한 느낌이 들어 그저 무심코 잡아주려 했을 뿐. 그런데 약 5m 뒤에 옆 부서 여자 부장님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주 환하게 웃었다. 원래 업무상 까다롭고 차갑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는데도 정말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멋쩍게 맞웃으며 기다려서 문을 잡아드리고 내 갈길을 갔다. 뭐, 큰일이 아니었으니 그냥 그렇게 지나갔고 나는 그저 잊어버렸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났을까, 원하는 부서로 옮기고 싶어서 시도하다가 소속한 부서장의 반대로 무산되어 버렸다. 속상한 마음에 술을 진탕 먹고 다니던 며칠 후, 가도 좋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고 싶던 부서의 부서장이 위의 임원에게 강력히 어필해줬다는 소문. 아주 나중에 부서 회식을 하는데 부서장이 그 여자 부장님한테 뭘 어떻게 했냐고 웃으며 물어본다. 그분 그렇게 엮일 일이 없었는데요 얘기했더니
"그렇게 당신 칭찬을 나와 위의 임원에게 했다, 어떤 아부를 한 거냐 (웃음)"

둘 째,
지금은 벌써 6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처음 이직은 힘들었다. 대기업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연봉도 더 많이 받고 싶었지만 이직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때는 헤드헌터라는 개념도 잘 없었고 나는 아직 업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주니어였으니. 
업무 파트너였던 외국계 IT회사의 이사님이 연락을 해왔다. 내가 이번에 다른 회사로 옮기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감사하며 이직했다. 그 회사에 들어간 후 같이 식사를 하며 여쭸다. 왜 저에게 연락하신 거냐고.
"그때 같이 일할 때 내가 진짜 힘들었어요.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당신이 소주 한잔 하자고 하더니 힘내시라고 해줬던 때 정말 힘이 나더라고. 그리고 내가 하루 만에 보고서를 써야 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당신이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더니 도와줘서 끝낼 때가 있었지.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셋 째,
다시 첫 번째 회사에서 있었던 일. 가끔 사무실 바닥 카펫 청소한다고 주말에 의자를 모두 책상에 올려놓고 가던 때가 있었다. 뭐 항상 일찍 출근하는 스타일은 아닌 나지만 그다음 월요일 우연히 우리 층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게 되었다. 앉아야 하니 내 책상에 올려 있는 내 의자를 내려놓았다.
평소에 남을 배려하고 이런 스타일은 절대 아닌 젊은 시절의 나였지만, 아... 내 꺼만 내리고 앉아 있자니 뻘쭘하네. 옆의 의자를 내리고. 아 또 이거만 내려놓자니 그러네 하고 그 옆의 의자도 내리다 보니 우리 부서 라인의 의자를 다 내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옆 라인 책상에 올라가 있는 다른 부서 의자들이 너무 처량해 보였다. 에이 뭐 몇 개 안되는데 다 내려놓자 하고 내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아이고... 뭘 혼자서 이렇게" 하며 달려오는 사람. 옆 부서의 과장님이었다. "아.. 아니 그냥요" 겸연쩍게 웃으며 같이 의자 내려놓기를 마무리했다.
그 과장님은 그 후로 몇 년 동안 우리 부서와 회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만 되면 그 에피소드를 꺼내며 나에 대한 좋은 얘기를 해주셨다. 

운명은 수많은 작은 의지들, 개인 의사들의 총합이다.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결과를 만든다.

때로는 당장 내 이익에 별 도움이 안 되거나 심지어 불편해지는 상황일 때 행하는 작은 일. 그것들이 모여서 크나큰 결과를 만들어 낸다.  

작은 선한 의지와 크지 않은 친절들이 세상뿐 아니라 내 자신의 운명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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