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영어를 원어민 처럼 잘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내가 처음 회사에 갔을 때만 해도 우리 부서에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해외사업팀의 한두 명 정도 밖에 없었다. 당시 인도의 거래처에서 누가 왔는데, 다들 그 사람과 만나지 않으려 애를 쓰고 막내에서 의전을 담당시켰던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이래저래 다국적회사로 이직을 하고 나니 영어를 써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아졌다. 기본적인 문서나 이메일은 어떻게든 시간을 투자하면 되니 따라가겠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본사와의 TC(teleconference)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기 어려운데, 전화기의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영어는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다. 간신히 인사를 하고 나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고, 다시 물어보거나 같이 TC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렇다고 쏟아지는 업무에 한가하게 영어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고, 말 그대로 생존영어(survival English)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달이 지나자 TC를 하는 것이 많이 익숙하게 되었다.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관련 용어들과 표현들에 익숙해졌고, TC를 하는 상대편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기고, 몇 번의 오프라인미팅을 통해 얼굴을 보고 나니, 어느 정도의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었고, "pardon me", 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줄어 들었다.
영어도 결국은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당시 나처럼 영어 때문에 고민을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는 독일계 화학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사무실이 같은 건물에 있어 가끔씩 만나서 수다를 떨고는 했었는데, 어느날 이 친구가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친구는 대학원 때 교환학생으로 해외에서 1년 넘게 생활을 했었고, 워낙에 성실한 친구였기에 영어로 고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독일에 있는 직원과 한 시간이 넘게 통화를 하고,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독일에 있는 직원이 이 친구의 상사에게 이 친구의 영어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아 업무진행이 어렵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이 친구가 선택한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업무를 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잘 못 알아들어서 놓치거나, 오해를 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영어로 전화를 하기 전에 하나의 script를 미리 작성을 했다. 예를 들면, “안녕, 잘 지내니? 거기 날씨는 어떠니? 내가 지금 너에게 전화를 한 건…” 이렇게 말이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뭔가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안녕, 잘 지내니? 거기 날씨는 어떠니?? 내가 지금 너에게 전화를 한 건…” 조금 단순하면서도 뭔가 번거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이런 식으로 한동안 업무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적어도 업무에 차질이 발생하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이 친구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전략 파트에서 일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 영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의 완성도나 발음의 정확도 보다는 우선 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고 또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이런 전화 통화가 끝나면 핵심적인 내용들을 별도로 정리해서 이메일로 공유하고, 서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곤 한다.
영어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가 아니다.
영어는 모국어 기준으로 중국어와 스페인어에 있어 3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일 뿐이다. 다만, 업무 상황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에서는 모두 영어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프로젝트가 모두 마무리 되고, 각 나라의 대표들이 마무리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전체 프로젝트의 리더는 스웨덴 국적이었는데, 그 분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으로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분만이 아니라, 그 동안 너무 유창하게 영어로 잘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인도나 다른 나라에 있던 리더들도 모두 동의했고, 영어가 어렵다는 말로만 한 30분 정도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다.
미국영어 vs. 글로벌 영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못된 영어(Broken English)를 사용할 때, Konglish(Korean English)라는 말을 사용한다. 똑같이 인도에서는 Inglish, 싱가폴에서는 Singlish라고도 한다. 각 나라의 독특한 억양과 표현들이 섞이면서 영어는 조금씩 진화하고 변화해 가고 있다. 예전 회사 사장님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호주와 영국에서 주로 생활을 하셔서, 미국식 발음과는 다르게 t 발음을 정확하게 하시곤 했다. 한번은 사장님이 미국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오신 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었다. 미국에 있는 식당에서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평소처럼 발음을 했더니 웨이트리스가 무시하다가 미국식으로 t 발음을 하지 않았더니 그 때서야 물을 가져다 주었다고 했다. 사장님께서는 원어민인 본인도 미국가서 차별을 받는데, 원어민이 아닌 사람들은 얼마나 차별을 받겠냐며 살짝 흥분하셨었다. 또 한번은 다른 나라의 마케터들과 함께 워크샵이 있었다. 워크샵이 끝난 후 몇 일 후 당시 미팅에 함께 참석했던 전무님에게 워크샵 피드백을 받았는데, 워크샵 내용이나 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어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 참석자들은 다들 천천히 정확하게 발음을 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너무 빠르게 말을 해서 잘 들리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영어로 말할 때 천천히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 워크샵에 원어민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면 모두가 알아듣기 편한 글로벌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세상에는 미국영어와 글로벌 영어, 즉 2 가지의 영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영어학원에서의 고정된 표현, 언어는 살아있는 것이다.
면접관으로 면접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 후보자들의 이력서를 보면 모두 상위 1% 이상의 공인된 영어 점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터뷰 중에는 굳이 영어로 된 질문 등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별 생각 없이 영어로 자기소개를 한번 부탁했었다. 대부분 그 정도는 영어로 준비해 온다고 생각했었고, 공인된 영어 점수도 거의 만점에 가까웠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면접자는 제대로 자기소개를 진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점수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로 부족한 영어실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저 학원을 다니면서 책으로만 공부하면서 공인된 점수만을 얻기 위해서 였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나도 시간에 여유가 생기면서 영어학원을 다녔다. 2개의 수업을 들었는데, 하나는 한국인 강사였고, 하나는 미국인 강사였다. 한국인 강사는 영어는 계속 진화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새로운 용어들과 표현들이 계속 생기고, 하나의 단어가 고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실제 회사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중 일부는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그게 그 산업군 전반에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미국인 선생님께서는 사전적 의미만을 강조하셨다. 수업 중에 자유토론을 하면서, Franchise 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회사에서는 비슷한 그룹의 제품들을 묶어서 franchise라고 하기도 한다고 했더니, 그 영어 선생님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되고, 흔히 말하는 대리점 정도의 의미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정색을 하면서 무안을 주었던 일이 있다. 영어는 배우는 입장에서는 가능하다면 정확한 발음과 정확한 문법을 배우는 것이 분명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배운 영어를 사용할 때는 환경의 변화에 맞게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더 매끄러울 것이다.
영어는 우리가 업무는 하는데 있어 어느 덧 필수적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항상 공부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그 자체가 아니라 영어를 통해 전달하고 전달받고자 하는 그 내용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배의 노하우님 더 많은 글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