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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티를 잘 내지 않는 편입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어르신들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칭찬받을 일도, 열심히 한 일도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고 묵묵히 일하곤 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제 성격이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습니다. 대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조금 달랐습니다. 작은 사회더라도 역시 사회는 사회였습니다.
저보다 일을 덜 하는 사람도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저보다 일을 더 하는 사람도 윗사람에게 혼나는 곳이 바로 군대였습니다.

 학창 시절과 대학생활에서 이런 제 성격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성과의 지표를 성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는 시험 점수를 통해 피부로 와 닿았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했고, 그럴 때마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곧 윗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해도 결국 사람은 사람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을 믿기 마련이었습니다. 이십 년 넘게 제가 배우고 믿어온 세상은, 열심히 일한 사람은 결국 인정을 받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처음 겪는 그러한 인지부조화는 저를 무너뜨리기 충분했고, 스스로 변하지 않고 그 힘겨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난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언젠간 인정받을 거다.'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었지요.


 대학생활의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열심히 공모전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거, 리스크가 너무 큰데..



 저 또한 대학 생활 동안 부단히 공모전에 도전했었습니다. 한때 광고인을 꿈꿨고, 지금은 마케터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많은 도전에도 금테 두른 종잇장은 하나뿐입니다. 그마저도 메이저 공모전이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공모전이었습니다. 물론 그나마 그 하나라도 건졌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너는 그거라도 있잖아!’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네 달 넘게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바로 공모전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공모전이었습니다. 수상의 여부를 떠나서, 생각의 방향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고 토의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정말 재밌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시즌이 되어서 제 대학생활을 정리할 때,제가 열심히 했던 공모전들을 정량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표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회사는 열심히 대학생활을 보낸 증거물을 가져오라고 하고, 그 증거물은 오로지 제 머릿속에만 존재했습니다. 그것을 꺼내 보여줄 수 없는 한, 저는 거짓말쟁이였고 대학생활을 헛되이 보낸 학생이 되어있었습니다. 


취업이 힘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 최선을 다했고, 우리의 모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쏟아부은 그 최선과 노력이 ‘최종 합격’이라는 단어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일본의 잃어버린 이십 년처럼, 우리의 취업준비기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있었습니다.  



최선을 결과로 판단하는 사회


 이 사회에선 '최선'에 대한 판단을 오로지 결과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릴 때부터 들었던 ‘최선을 다했으면 괜찮다.'라는 말에 점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면 괜찮은 건가? 최선을 다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걸까?' 어느새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그 의심스러운 분위기에 물들어 최선은 곧 결과라는 명제를 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 또한 공모전에만 몰두했던 스스로에 대해 후회를 했었고, 후배들에게도 주제넘게 오지랖을 부렸습니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어느새 어떻게든 정량적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숫자를 받아 들 수 있는 역량만을 강화하고 있고, 그만큼의 사회적인 낭비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숫자들이 우리의 능력을 보장해주는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못했을 뿐,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저의 이십 대 중반은 취업준비만 했던,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텅 비어버린 시간입니다. 심지어 남들이 흔히 갖고 있는 토익도 없고, 취업이 힘들다는 지방대 주제에 학점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정신력으로 버텨가면서 이렇게 살아온 이유는 아직 증명되지 않은, 혹은 앞으로도 증명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노력은 상대적일 수 없습니다. 노력은 절대적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최선을 인정받는 시기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언젠간 저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힘든 군 생활을 버텼던 것처럼, 지금도 그 마음으로 오랜 기간 취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 사람의 최선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못했을 뿐,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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