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실행 - 닥치고 실행, "이순신은 12척 몰고 나가고 싶었겠니?"
알렉스 퍼거슨의 책 리딩을 읽다 보니 "다른 팀이 우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승을 놓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조직이던 목표가 있다. 하물며 뇌물을 받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목표가 존재한다. 내 생각에 목표란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단기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면 과정 속에서 배운 지식과 시야, 확장된 사고를 갖고 그다음 단계의 과정으로 간다. 게임의 레벨업과 같이 능력의 향상이 도모되지만 더 많이 알게 된 만큼 더 높은 수준의 환경들과 다시 한번 맞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란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방향성들에서 공통된 방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리더십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들면, 벤허에서 노예들을 묶은 뒤 채찍으로 내리치며 앞뒤자와 열을 맞춰 노를 젓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량처럼 모두가 하나가 된다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서로 도와가며 전력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 구도를 설계하고 만들어 내는 사람이 리더다.
리더에 대한 일반적 상상은 직급, 직책이 높고 금전적 보상도 많고, 사람들에게 지시도 하는 상상을 많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영업팀장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육체적으로 말단보다 못한 직업이다. 내가 농담 삼아 아무 거나 하는 흥신소 주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렇다. 복마전 아우성과 같은 팀원들의 질문과 요구사항, 임원들의 시시콜콜한 소원수리를 받으면 정작 나의 시간과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과는 멀어지는 삶이 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전체를 향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담아 한 계단씩 올라가는 일에서 보람을 찾기도 한다. 가끔 나도 "모르겠고!!"라는 말이 나오기 한다.
상당히 많은 괜찮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수학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정규분포 곡선을 보면 중간(50%)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뉜다. 어째던 중간을 기준으로 절반은 중간 이하라는 논리적 딜레마에 다다른다. 다만 사람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 연결되다 보니 어떤 것은 중간 이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할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자네 꼬라지를 좀 돌아보라"라는 말이 2천 년 넘게 유효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목표와 상관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피지기(내 처한 꼬라지를 알아보자)를 위함이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임하는 경기의 규칙을 모른다면 헛삽질을 하기 딱 좋은 여건이 되기 때문이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한다. 따라서 목표는 지속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 변화를 내가 주도하느냐 외부환경에 질질 끌려다니는가는 성패를 결정할 때가 많다. 그 변화의 격동에서 중심을 잃기 않기 위해서 방향성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10%의 진도를 목표로 하다가도 아프면 5%로 조정하고, 앞으로 잃어버린 5%를 어떻게 보완하여 약속한 일정을 맞출 것인가, 여력이 생기면 얼마만큼 더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실행 활동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목표와 하고 싶은 것(소원)을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윗사람이 소원수리를 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해야지요"라는 말부터 내뱉는 부류들이 있다. 나는 그런 자들을 "손금 없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손금 없는 자들의 특징은 술 취해 이리저리 발자국을 남기고, 회의 때면 "자 똑바로 걸으라"는 한마디와 함께 다시금 이리저리 헤매는 발자국을 찍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질러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거는 묻지 마세요" 또는 정신승리법으로 극복하고 힘든 일은 타인에게 밀어서 해결하려 하고, 내일을 위해서는 뒷일은 모르겠지만 소원부터 말하고 본다. 대단히 관념적이고 행동 없이 사는 얄팍한 부류다. 또 한 가지 이런 부류는 자신의 금전적 이익과 영달에는 재빠르지만 조직 전체를 위한 실행계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사실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란 "얼마나 숫자를 낼 거야?", "어떻게 할 거야?"같은 호기심 천국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도와주는 일에도 없다. 다만 내가 귀찮아지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천라지망과 같은 레이다를 촘촘하세 세울 뿐이다.
자 그럼 돌아봅시다. 우리는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스스로를 포함해서), 원대한 방향(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오늘은 무엇부터 해낼 것인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해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매일 종이에 진도가 어느 정도인지 적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도 실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관리라고 하면 다들 실행 없이 관리만 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소대장 열명에 사병 1명이 참호를 파는 삽질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보기 좋고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것이 숫자입니다. 금액 1백만 원을 달성하면 목표가 달성되고 지금부터 놀아제끼면 되는 것인가요? 낮은 수준의 목표에 익숙해지면 사람의 안목과 품격, 가치도 낮은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소중한 꿈과 꿈을 달성하기 위한 실행 즉 목표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사상누각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안목이 필요한 이유란 조직과 삶에 있어서 더 원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년초의 목표와 년말의 결과를 비교하는 것은 끝났다. 장수가 한 번의 승리에 도취해서도 안되고, 한 번의 패배에 좌절해서도 안된다. 한 번의 승리를 통해서는 더 나아갈 방향을 두루 살펴볼 여유가 생길 것이고, 한 번의 패배를 통해서는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이순신은 12척을 끌고 적진에 나가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다만 그런 용기란 나에게 주어진 책임감과 소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 나가면 삶도 끝이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연전연승으로 한숨 쉬며 계속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합니다. 한번 웃고 스트레스 날리기엔 딱인 듯합니다. '죽기로 마음먹으면 반드시 산다'는 말이란 그런 용기와 실행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웃자고 한말에 죽자고 달려들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정규분포에 대한 제 의견을 돌아보시고, 일정한 성과를 낸다는 것은 정규분포상으로 보면 어영부영 대충 중간을 맞추자는 자세로는 안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결과를 낸다는 것은 중간 어디서 헤맬 때가 아니라 약간 어떤 방향이라도 맛이 간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맛이 간 상태가 궁극에 다다르고 지속성까지 같는다면 예수, 부처, 공자와 같은 성인의 반열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몰입이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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