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L사를 떠나 D사에 입사하면서부터는 영업과 마케팅 분야에서만 경력을 쌓았다. 처음에 D사에서 채널 영업부터 시작하여, 마케팅과 기획을 경험하고, J사에서는 신사업 개발을 하면서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대면 영업을 했고, T사에서는 B2B 영업을 경험했다. 화학, 소비재, 공장 설비 등 다양한 산업군과 회사를 거쳤다. 운이 좋게도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회사를 다녔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도 영업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어색하지 않을 경험과 지식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내 경력 개발의 시작은 D사에서부터다. 5년 가까이 채널 영업을 하고 나니,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다른 부서를 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같은 부서에서 마케팅/기획을 같이 하는 포지션으로 부서장이었던 H 상무님이 끌어주셨다. 그전부터 이 포지션을 해보고 싶다고 H 상무님께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는 영업 현장에서 직접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시각으로 비즈니스를 바라보면서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영업을 하고 나서 마케팅과 기획을 하는 것은 상당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때문에 영업활동에 도움이 되는 마케팅 계획을 짜기 쉽고, 현장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실행 가능한 기획안을 작성하기 쉽다.
J사 재직 시절을 생각해보면, 다른 산업군에서 온 나를 뽑아준 Y 부장은 내게 J사에 안착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그 당시 3개월이면 적응할 줄 알았으나 6개월이 돼서야 내 업무와 회사 문화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한동안은 갈피를 못 잡고 헤맨 셈인데, Y 부장은 J사에 맞는 업무 스타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나를 이끌어주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그냥 알아서 하게 두었다면 J사에서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무척 Y 부장이 고맙다.
이 두 예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내 Hiring Manager는 내게 경력 개발을 할 기회를 주었다. 내가 했던 업무는 아니었지만, 내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내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건 사람에 대한 투자다. 경력 개발은 이렇게 Hiring Manager의 투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난 이런 투자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경력 개발(Career Development)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보여줬던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태도'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이 2~3%대에 머물면서 한국 주재 외국계 회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경향이 심화된다는 점이다. 회사가 성장해야 한국 비즈니스를 총괄하던 사람이 아시아 총괄로 가고, 그 자리를 밑에서 채우고, 또 빈자리를 밑에서 채우면서 새로운 직무를 할 기회가 생기는데, 성장이 멈추면 그런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흔치 않게 좋은 자리가 나더라도 '투자'를 해서 새로운 사람을 키우기보다 이미 경험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게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경력 개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나도 고민이 많았다. 이미 매니저로서 경력을 10년 가까이 쌓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한국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디렉터 포지션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유사한 자리라고 해봐야 지금 회사보다 훨씬 작은 규모 회사의 디렉터나 1인 지사장 제의가 들어오는 형편이었다. 물론 싱가포르로 옮겨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경력 개발을 생각하기보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지만, 외국계 회사에서 부장 ~ 이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긴 하다.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인 지사장 자리로 가든가 아니면 창업을 해서 내 일을 하는 것이다. 더 작은 회사의 디렉터 자리로 가는 것은 현재 자리보다 매력 있을 확률이 크지 않아 나 같으면 택하지 않겠다. 그 무엇도 쉬운 게 하나 없다. 외국계 회사를 오래 다닌 나 같은 사람은 국내 회사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해외 진출은 더 어렵다. 인적 네트워크와 여기서 쌓아 올린 성과는 다시 제로가 되기 때문이다. 1인 지사장 자리는 흔치 않고, 창업은 리스크가 크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대안으로 생각한 것 모두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리스크를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까, 내년엔 어떤 일이 생길까 궁금해하면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보다 도전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