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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하던 일이 붕 뜨게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일한다는 게 중요했다. 이번 기회로 어떻게든 서울에 남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 당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내가 할 일은 본사 기획 부문에서 추진하는 한 전사 프로젝트였다. 각 사업부에서 차출된 대리~과장급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따지고 보면 경력이 이제 1년이 될까 말까 한 사원이 참여할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추측컨대 일이 붕 떠버린 나 말고는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고, 이런 프로젝트에 대리~과장급을 보내기엔 신생 사업부로서는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준의 업무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저 이런 프로젝트도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고, 간간히 나보다 경력이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었던 거 같다. 대략 6개월 정도 프로젝트를 했을까, 결과가 대략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CFO 보고를 끝으로 프로젝트가 끝났다.

 

이렇게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이 프로젝트를 이어서 마무리할 팀이 꾸려지게 되었고, 그 팀장에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P차장이 내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 역시 당연히 서울에 남고 싶은 마음에 신설되는 팀에 남아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지만, 내가 할 일은 없다며 원래 팀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자마자 공장에서는 나를 상대적으로 업무량이 많은 파트로 발령을 냈다. 아마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내 마음을 잡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뒤 놀랍게도, 다시 P 차장에게 연락이 와, 신생 팀에 합류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마음에, 그저 서울에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쾌재를 부르며 본사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게 내게는 결코 즐겁지 않은 회사 생활이 될 거란 걸 그 당시엔 몰랐다.

 

팀에 합류하고 보니 두 파트로 나뉘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파트는 그 전 프로젝트 팀 멤버가 주축이 되어 프로젝트를 IT화 하기 위한 작업을 했고, 또 다른 파트는 기획을 담당했다. 주로 CEO 성과 관리나 해외 법인 관리 등의 업무가 주어졌는데, 내게는 해외 법인 관리 업무가 주어졌다. 내가 속한 파트는 기획 부문의 다른 팀에서 온 분들이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내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도 좋았고, 여자 친구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본사’라는 말에서 주는 자부심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공계 출신이 본사에 근무하는 건 그리 흔한 기회가 아닌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런 허니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팀장인 P 차장이 가장 문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본사 부장/팀장도 실무를 했다. 그런데 이 분은 하루 종일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팀원들 관리 감독만 했다. 어쩌다 본인 상사인 상무가 오면 딸랑 거리는 건 주 특기였다. 본인은 전날 과음을 하고 30분씩 지각하는 건 괜찮고, 팀원이 5분 늦는 건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치열한 P차장의 관리 덕에 팀이 꾸려지고 7~8개월 새 나를 포함한 3명이 이직을 했다. 이렇게 팀장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온 지 6개월쯤 되니 내가 왜 이 팀에 왔을까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나 외에는 모조리 경영학과 혹은 그와 비슷한 전공을 한 직원뿐이었다. 굴러온 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텃새도 있었다. 비교적 입사를 늦게 했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 어린 선배 직원이 꽤 있었는데, 그중 한두 명이 나를 고깝게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후회를 하는 와중에 같은 팀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선배 사원이 ‘영업’ 쪽으로 사내 이동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영업 직무는 그 당시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데, 궁금해졌다. 내가 보는 그 엄청난 숫자들, 몇백억 원, 몇천억 원, 혹은 몇조 원, 이런 게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숫자가 만들어지는지 궁금했던 거다. 이렇게 굉장히 단순한 호기심이 시발점이 되어 영업 직무로 다른 회사 인터뷰를 보기 시작했고, 몇 번의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외국계 D사에 영업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쯤에서 이 일을 돌이켜 보면 아쉬움이 조금 남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내 경력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 점이다. 그 당시로 돌아가 지방 근무하면서 원거리 연애를 할래, 아니면 서울로 전보를 가 가까운 곳에서 연애를 할래라고 다시 물어봐도 난 후자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런 선택과 별개로 몇 가지 옵션 역시 생각했어야 한다. 조금만 참고 3~4년만 공장 근무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공장에 남아 근무를 하면서 여자 친구를 같은 지역에 취업을 할 수 있게 돕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주말 부부를 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서울에 취업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조금은 고생을 하더라도 탄탄한 공장 현장 근무 경험을 쌓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영업이나 마케팅 업무에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서울 근무하면서 그곳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다. 아마 서울 동료들은 내가 참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저 서울에 올라오겠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본사에 온 그런 철부지 사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더 나은 태도로 진지하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잘하지 못해 그런 게 당연하지만, 그때 만났던 선배 사원들 중 지금도 연락이 닿는 분이 한 명도 없다. 그 이후 D사와 J사 근무할 때 만났던 분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는 걸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이직을 하지 않고 다른 부서로 전보를 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업으로 간다는 동갑내기 선배처럼 다른 부서 전보를 요청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할 일을 충실히 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런 경험이 없었고, 회사를 잘 몰랐다.

 

인생에서 주인공은 나다. 내가 그때 어렸고 잘 몰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는 충실히 살았다. 그게 옳든 그르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인생을 끌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런 의지 덕분에 지금까지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내가 있는 자리에서만 방법을 찾으려 한 게 아니라 외부로도 눈을 돌려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던 건 칭찬받을만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내가 현재 속한 조직에 눈을 돌려 방법을 더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답이 없을 때는 떠나야 하지만, 정말로 내가 속한 조직에는 답이 없는지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런 노력을 충분히 하지 못한 아쉬움이 조금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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