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내 커리어가 다 끝나진 않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타이틀의 한계치는 이제 알 수 있다. 전 세계 수만 명 정도가 근무하는 지금 회사에서 내가 갈 수 있는 위치는 Director 정도일 거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지금 타이틀로 은퇴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게 눈에 보여서 편한 것도 있지만, 씁쓸할 때 역시 있다. 모를 때는 꿈이라도 크게 가질 수 있지만, 알만큼 아는 나이가 되면 큰 꿈을 가지는 것도 어리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앞으로 어떤 자세로 일을 할지, 특히 지금 회사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고민스럽다.
내 커리어를 지금 타이틀인 매니저로 끝낼 생각이라면 일 욕심을 크게 가지지 않아도 된다. 주어진 일 잘 해내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면 된다. 즉 지금처럼 하면 된다. 이건 쉽다. 하지만 여기서 승진을 하려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윗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대면하여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방법은 누가 봐도 그럴듯한 일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가능한 이 일을 하는 동안 내내 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속해서 그럴듯한 일을 계속 해내기 위해서는 실력은 기본, 결정적으로 운이 따라야 한다.
내가 한국에서 영업 이사로 했던 일은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성과였다. 내가 맡은 가장 큰 업체에 매년 설비를 판매했고, 그 업체 매출을 두 배 가까이 신장시켰다. 또 경쟁사와 붙은 모든 딜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내 뒤를 이어 이 업체들을 맡은 동료는 지금 울상이다. 모든 업체들이 코로나 때문에 신제품 판매가 여의치 않고 한 업체는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내가 그 자리를 떠난 이후에 생긴 일이다. 이걸 운 말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자리를 떠날 당시에는 그 좋은 자리를 왜 떠나냐고 고객까지 나서서 말렸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고객사들이 알아서 성장할 것이고 그 과실을 모두 내가 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내가 그 자리를 계속했다면 내가 해냈던 일들이 빛을 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내가 그 자리를 그 시기에 떠났기 때문에 내가 낸 성과를 고스란히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성과를 내고 인정받는 일도 운이 많이 따른다.
운이 많은 걸 좌우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지금 자리를 지킬지 승진을 생각하며 일할지 그 어떤 쪽에 설 지 결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건 전적으로 일에 얼마만큼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려있는데, 투자한 시간에 따라 일의 깊이가 달라지고, 성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준비하는 트레이닝을 예를 들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선 트레이닝에 대해 더 고민하고, 고민한 결과를 실제로 구현하고, 트레이닝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고 그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 적당히 일을 하는 것에 비하면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좋다. 경제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에 안주한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싱가포르에 와 클러스터 일을 하면서 많은 기회를 내 눈으로 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더 큰 성취를 원하게 됐다. 물론 내가 뜻한 대로 될는지는 미지수다. 그렇다 해도 내가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러다보면 커리어가 더 잘 풀릴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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